현지시간 25일 치러진 그리스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이하 시리자)이 예상대로 압승을 거뒀다. 시리자는 36.34%의 득표를 얻어 27.81%를 득표한 신민당을 의미있는 표 차이로 앞섰다. 그리스의 경우 득표율 1위 정당에 의석 50석을 자동할당 하도록 돼있기 때문에 시리자는 총 300석 중 149석을 획득했다. 이는 과반에 2석 못 미치기 결과이므로 의원내각제를 택하고 있는 그리스의 법률상 민족주의 성향의 그리스독립당, 중도성향의 포타미, 그리스공산당 등과 연립정부 구성을 논의해야 했고 결국 연정 파트너로 그리스독립당이 선택됐다.

시리자의 집권에 국제금융시장은 일정 정도 불안정성이 증가하고 있는 모습이다. 시리자의 선거 승리가 유로존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증대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시리자는 그간 유럽연합이 제공하는 구제금융의 대가로 제시된 재정긴축요구에 반발하며 선명한 주장을 내세워왔다. 따라서 유로존 국가들은 시리자가 집권할 경우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경우의 수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리자는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의미하는 ‘그렉시트’(Grexit)는 없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급진적인 좌파를 자처하는 시리자의 정치적 스탠스에 대한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고 있는 상황이다.

시리자의 선전은 우리나라의 진보정치세력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내의 진보정치세력이 상당한 지리멸렬에 이르게 된 상황에서 급진좌파적 지향을 갖고 있는 소수정당이 꾸준한 활동을 통해 집권까지 넘볼 수 있게된 비결이 무엇인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 시리자 대표 알렉시스 치프라스(40)가 아테네 대학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주먹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시리자는 스탈린주의 노선을 따르던 공산당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사회주의 세력이 생태주의, 여성주의 등 새로운 대안 이념과 결합하며 만들어진 정당이다. 이들은 창당 직후 교조적 태도로 스탈린주의를 고수하는 그리스공산당,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PASOK) 등에 밀려 소수정당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고 2009년까지 원외 정당으로 전락할 위험 속에서 가까스로 생존을 이어왔고 심지어 일부 인사들이 탈당해 ‘민주좌파’를 결성하는 분열까지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를 덮친 전례없는 경제위기와 긴축재정의 강요로 약자에 대한 사회적 고통의 전가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자 긴축을 반대하는 유권자들이 시리자에 대한 지지를 계속 표명하면서 점차 그 영향력을 늘려갔다. 특히 2006년 32살의 젊은 나이로 아테네 시장 선거에 나가 10%가 넘는 득표를 했던 알렉시스 치프라스의 대중정치적 카리스마가 큰 효력을 발휘했다. 치프라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유로존을 포괄하는 국제금융시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자 유권자들의 지지는 ‘쏠림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급격하게 상승했다.

물론 시리자의 성공 비결을 치프라스라는 출중한 개인의 능력에서만 찾는 것은 이 사태를 절반만 이해하는 것이다. 진보정치세력의 입장에서 보다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이들이 시대정신을 꿰뚫는 구체적이고 대중적인 구호들을 현실화시켜냈다는 점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정책이나 슬로건들은 그저 올바르고 원칙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구태에서 벗어나 경제적 위기와 긴축으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그리스 대중들의 입장에서 ‘그 시기’에 필요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한 것들이었다. 이들의 이러한 정치적 감각이 풀뿌리 민중운동과 결합하자 일정한 정치적 시너지 효과를 얻었고 이를 통해 시리자를 향한 지지가 다시 확대되는 선순환 구조가 확립됐다. 시리자는 이러한 공세적인 활동을 통해 ‘조직노동’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는 종래의 약점을 극복했다.

이 선순환 구조가 확립된 이후 시리자가 한 것은 자신들의 주장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평가하며 오히려 시리자의 집권이 그리스 경제를 더욱 파탄지경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보수세력의 주장을 하나 하나 반박하는 것이었다. 시리자가 스스로를 단호한 문제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현실적 대안을 갖고 이를 실현할 능력이 있는 좌파로 포지셔닝하면서 보수세력의 ‘악선동’은 상당 부분 무력화됐다.

무엇보다도 스탈린주의나 조직노동으로부터 이어져 온 고전적 좌파의 이념 뿐만이 아닌 생태주의와 여성주의 등 새로운 사상을 당의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토대로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을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이라는 점을 대중들에게 어필하면서 비교적 긴 시간 동안 단결적 조직의 형태를 유지하는데 성공한 것도 이들의 성공 비결로 꼽힌다. 이를 통해 이들은 다른 유럽의 국가들과 같이 하마터면 극우주의에 빼앗길뻔한 젊은 급진적 에너지를 좌파정치로 수렴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 시리자와는 달리 국내 진보정치세력의 오늘은 초라하기만 하다. <한겨레>는 26일 1면, 8면, 9면에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정의당 등이 등장하는 진보정치 15년에 대한 기획기사를 실었다. 한때 10개의 의석을 확보했던 민주노동당의 성과가 자주파와 평등파라는 양대 정파들의 끝없는 싸움 끝에 결국 오늘날의 진보정치 붕괴로 이어졌다는 게 이날 기사의 주요 내용이다.

▲ 한겨레 26일자 8면.

아마 이러한 평가는 진보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표준처럼 틀어박혀있는 일반적인 내용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간 진행된 진보정당운동의 쇠락 원인의 상당 부분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 이면을 보아야 할 필요도 있다. 과연 민주노동당을 기원으로 하는 자주파와 평등파라는 양대 정파가 무엇을 놓고 싸운 것인가를 심도있게 고찰해봐야 한다. <한겨레>의 기사에서는 당내 권력과 북한에 대한 입장 차이가 핵심이었던 것으로 기술돼있다. 그런데 당시의 정파갈등의 이면에는 그야말로 이념적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가 존재한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시리자가 과거 스탈린주의 정당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사상의 혁신을 도모했던 것처럼 민주노동당 내 자주파와 평등파의 논쟁구도 역시 이념과 사상의 혁신에서 볼 수 있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당시 평등파들이 문제 삼았던 자주파들의 오류는 대부분 스탈린주의의 변형이라는 구태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구소련으로부터 각국의 진보정당들에 전파된 스탈린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세계의 좌파들이 늘 직면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 나름의 해답으로서 제시되었던 것이 진보신당 창당 시기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문제의식이다. 물론 ‘진보의 재구성’은 “좀 더 유연해져야 한다”는 사실상의 우경화론과 “생태주의와 여성주의 등의 다양한 이념적 준거를 당의 운영원리로 삼아야 한다”는 혁신론 사이에서 길을 잃었고, 오늘날에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됐다. 하지만 진보정당운동의 위기 극복 방법의 결론이 자주파와 평등파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에 그친다면 실패가 반복될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금 진보정치의 단결과 혁신을 위해 필요한 것은 시대정신을 꿰뚫는 문제의식과 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실제 진보정치의 운영원리를 규정하는 대안적 이념과 사상이다. 이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냉소주의를 뚫고 대안적 체제에 대한 열망을 이끌어내야만 진보정치는 실질적으로 부활할 수 있다. <한겨레>의 기사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좋은 관점과 분석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핵심을 빠뜨리고 있는 측면이 있다. 남은 기획에서 이 부분이 어떻게 채워질지 관심있게 지켜봐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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