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우드 숲에서 로빈훗과 뜻을 같이 하는 의적들에게 있어서 누가 왕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로빈훗이 모시던 리처드 왕이 다스린다 해도 국민은 나라에 바치는 세금을 떼이고 나면 먹고 살 것이 막막해 셔우드 숲에서 도둑질로 삶을 연명했으니 의적들은 존이 왕이 되어도, 필립이 왕이 되어도 왕이 국민을 위해 선정을 베풀 것이라는 기대 자체를 포기했을 것이다.

▲ 뮤지컬 ‘로빈훗’ ⓒ엠뮤지컬
어떻게 보면 필립이 삼촌인 존을 피해 셔우드 숲에 들어간 건 왕이 되기 전에 민심을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셈이다. 만일 필립이 셔우드 숲에 들어가서 백성들이 어떤 부분에서 고심하고 괴로워하는가를 살피지 못했다면, 아마도 필립은 왕이 되어도 민심을 알지 못하고 일방 통치로 치닫는 왕이 되었을지도 모를 테니 말이다. 숲에서 힘겨운 나날만 겪은 것이 아니라, 민심을 파악하는 제대로 된 계기를 만난 건 필립에게 있어 천운이었을 테다.

하지만 ‘로빈훗’의 필립은 딱 여기까지다. 민심을 읽고 그 가운데서 국민을 위한 왕이 무엇인가를 배워가는 왕자로서의 필립은 있지만, 그렇게 백성을 위해야 한다는 마인드를 배운 필립이 백성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가에 관해서는 뮤지컬이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백성을 위한 왕세자 트레이닝은 받았지만 정작 트레이닝을 받고 난 다음의 필립의 행보가 구체적으로, 아니 조금이라도 묘사되지 않는다.

심한 말로 표현하면 로빈훗과 셔우드 숲의 의적들은 필립이 존과 길버트의 음모를 뚫고 왕위를 이어받기 위해 사용되는 일회용 졸(卒)로 취급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이 뮤지컬은 ‘로빈훗’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필립의 왕위 이어가기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달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연출의 방점도 명확하지 않다. 진지한 시대극과 코미디 가운데서 갈피를 못 잡는다고나 할까. <두 도시 이야기> 같은 시대극의 진지함에 존 왕의 개그 드립이 믹스된 건 시대극 특유의 엄숙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환기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국적 불명의 뮤지컬 퓨전화를 추구한다는 느낌이었다. 특히 존 왕이 “너, 주교”를 “너, 죽여”로 말장난할 때는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 뮤지컬 ‘로빈훗’ ⓒ엠뮤지컬
로빈훗이 주인공이라는 설정이 무색하리만치 로빈훗의 활약, 혹은 필립의 성장기로 바라보기에는 길버트와 존이라는 악당 2인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컸다. 악당의 존재감이 컸다는 것은 로빈훗과 필립의 카리스마가 길버트에 비해 약했다는 걸 증명한다. 2막에서 길버트가 함정을 파 놓았으리라는 걸 의심하지 않고 달려드는 로빈훗과 의적의 행보는 관객이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마지막 장면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비장한 결말로 마무리를 했어도 충분했을 것을, 1막의 피날레에나 어울리는 장면으로 시제를 교차해서 마지막을 장식했다. 신파적인 마무리를 피하기 위한 의도라는 건 짐작이 되지만 1막과 2막의 피날레를 혼동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방점을 명확하게 찍지 않고 무대화를 할 때 이도 저도 안 된다는 걸 증명하는 뮤지컬이 ‘로빈훗’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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