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러가 벌어지기 바로 직전, <샤를리 에브도>는 트위터를 통해 IS(이슬람 국가)의 지도자인 아부 바르크 알 바그다디의 신년사를 풍자하는 만평을 게재하였다.

지난 1월 7일, 갑작스레 충격적인 외신이 전해졌다. 프랑스의 오래된 풍자 만평 전문잡지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에 괴한들이 난입해 총기를 난사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로 인해 잡지의 편집장과 만화가, 경찰을 포함해 총 12명이 사망했다.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시다)라는 문구를 외치면서 테러를 감행했다 전해졌고, 자연스레 테러범의 정체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1월 8일, 파리 남부에서 경찰을 대상으로 벌어진 총기 난사 테러를 벌여 1명이 사망했고 다시 그 다음날에는 파리의 코셔 푸드(유대교 율법을 따라 만들어진 식료품) 판매점에서 인질극을 벌여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범인은 총 네 명으로 이 중 세 명은 현장에서 사살되었으며 남은 한 명은 시리아로 도피를 한 상황이다. 테러가 발생한 초기에는 사건의 주체에 대해서 많은 말들이 오갔으나, 이후 프랑스 경찰을 통해 IS(이슬람 국가)와 알 카에다 조직원들이 결합하여 사건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로 사망한 만화가는 총 다섯 명이다. 프랑스에서 열린 대형 참사인 동시에 이번 달 29일부터 프랑스에서는 세계적인 만화 축제 중 하나인 앙굴렘 만화 페스티벌이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현지의 반응은 너무나도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필자 역시 만화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많은 만화가들이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고 만 것에 깊은 애도를 보내는 바이다. 이렇게 테러의 충격이 프랑스는 물론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를 감싸고 있는 가운데, 그 충격보다 더 큰 후폭풍이 밀려오고 있다. 테러가 벌어진 이후 프랑스에서는 “내가 샤를리다”(Je Suis Charlie)라는 표어를 내건 대규모 추모가 벌어지고 있으며, 해외에서도 이러한 문구를 삽입한 프로필 사진, 해쉬태그를 단 사람을 종종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표현의 자유와 이슬람 등 종교에 대한 논쟁이 국가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론사에 가해진, 그것도 이슬람 극단주의를 풍자한 만평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벌어진 테러에 대해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소중한 표현의 자유에 대해 심각한 수준의 폭력을 자행한 테러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제기한다. 이러한 주장에 다른 누군가는 마치 거울과도 같은 모습으로 반론을 내놓는다. 표현의 자유는 소중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무함마드와 같은 이슬람의 성인(聖人)을 심각한 수준으로 조롱한 것은 분명히 위험한 행동이며 그러한 모습들이 극단주의 세력의 테러에 원인이 되거나 총기와 같은 직접적인 폭력은 아니더라도 문화적인 차원에서 폭력이 되었다는 말을 한다. <경향신문>에 게재된 이택광 경희대 교수의 칼럼 <‘표현의 자유’라는 상식에 대한 도전>, 그리고 이 칼럼과 같은 날에 실린 손재민 특파원의 기사 <과격한 표현 자유, 호전적 근본주의… 극단과 극단 사이 설 땅 잃은 ‘화해’>는 이러한 시각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글들이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것은 이에 대한 재반론이다.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 극단주의만이 아니라 ‘국민전선’과 같은 프랑스 내 극우 세력에 대해서 풍자하는 등 성역을 가리지 않는 풍자를 끊임없이 해왔으며, 분명히 테러라는 수단은 잘못된 것이라는 논지에서 진행된다. <슬로우뉴스>를 비롯한 인터넷 기반 언론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렇게 논쟁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틀린 말이 아니다. 모든 시민에게, 특히 언론사에게 있어 표현의 자유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가치이며 이에 대해서 테러라는 수단으로 폭력을 가하는 것은 그러한 가치를 지키는 것을 스스로 꺼리게 만든다. 작년에 벌어져 충격을 주었던 신은미-황선의 ‘통일 콘서트’에 가해진 테러 사건도 콘서트를 주최한 이들의 성향에 대한 왈가왈부를 넘어 분명 비판을 가해야 마땅한 일인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해서 그러한 기치 아래 나온 결과물에 대해서 비판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만화가 박경은이 2012년의 <매거진 만화규장각>, 그리고 2014년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프랑스 현지에서 테러가 벌어지기 이전부터 <샤를리 에브도>의 이슬람 풍자 만평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다. 특히 종교연구학자인 도니아 부쟈(Dounia Bouzar)는 이들의 만평이 이슬람 혐오주의자와 이슬람 극단주의자 간의 장벽을 더욱 높이 쌓았다고 강하게 비판했었다. 하지만 이들의 만평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테러라는 형식이 옳은 선택이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렇게 한 쪽에서는 테러의 폭력성과 끔찍함을 질타하는 동시에 <샤를리 에브도>의 성역 없는 비판-풍자 정신을 지키고 기억하기 위한 명목으로 “내가 샤를리다”를 말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샤를리 에브도>의 이슬람 관련 만평이 결과적으로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증폭시켜 또 다른 갈등을 폭발시켰다고 지적을 한다. 논점의 축이 표현의 자유가 어떤 선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그리고 이슬람을 비롯한 종교에 대한 문제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러한 논쟁은 쉽게 답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이 두 가지 주장은 서로 충돌하는 동시에, 합의점을 정하기 어려운 지점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중요한 것이지만 분명 그 결과물에 대해서 비평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표현의 자유가 넘지 말아야 할 선과 어떤 대상에 대해 말을 하지 말아야할 시기를 정해야 한다면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정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파시즘과 같이 명백히 위험한 이념에 대해서는 쉽게 기준을 정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샤를리 에브도>의 역대 만평들처럼 쉽게 가르기 어려운 표현물이 더 많다. 이러한 두 개의 반응은 결국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서고 만다.

왜 그들은 극단주의에 빠져들고 말았는가

▲ <샤를리 에브도>는 2011년, 지난 2006년 덴마크의 한 신문에 게재되어 많은 논란과 사회적 문제를 낳았던 무함마드를 풍자하는 만평을 다시 게재하였다. 이후 <샤를리 에브도>의 건물이 방화되는 테러가 일어났었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샤를리 에브도>의 표현이 적절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왜 백주대낮에 총기 난사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달려 있다. 물론 이에 대한 쉬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범인들은 각각 IS와 알 카에다라는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의 일원들이었으니, 문제의 책임은 이슬람 극단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질문은 그 지점에서 그치면 안 된다. 대체 왜 범인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져들었나에 대해 더 깊숙하게 사고를 해야만 한다.

범인 대부분이 이미 사망하고 나머지 한 명도 이미 도피를 한 상황에서 원인을 쉽게 찾기는 어렵지만 다양한 기사들에서 그 원인을 조금씩 유추할 수 있다. 네 명의 범인 중 사살된 사이드 쿠아시와 셰리프 쿠아시는 형제였다. <르 몽드> 등의 프랑스 언론에 의하면 이들은 알제리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고, 절도와 마약 거래 같은 각종 범죄를 일삼았던 인물들이었다. 또 다른 범인 아메디 쿨리발리는 세네갈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쿠아시 형제처럼 마약 거래와 절도 행위로 수감되었던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아메디의 아내이자 시리아로 도피한 공범인 하얏트 부메디엔 역시 알제리 출신이었다. 모두 프랑스 식민지였던 국가들에서 이민 온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거나, 그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 대부분은 사회 하위 계급을 전전하며 각종 범죄를 저지르다가 각각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에 빠져들며 서서히 ‘조직원’으로 자신을 재정립하게 되었다.

테러를 저지른 이들이 모두 이민자 가정 출신의 하위 계급이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물론 정말로 놀라운 확률의 장난일수도 있고, 범인들 대부분이 어렸을 적부터 각종 범죄를 저질렀던 것에 미루어 볼 때 원래부터 범죄를 저지를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테러범들의 계급적 위치와 테러를 마냥 분리할 수는 없어 보인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그렇듯 프랑스는 20세기 중후반 노동력을 수급하기 위해 터키, 동유럽은 물론 알제리, 세네갈 같이 옛날에 식민지로 소유하고 있던 국가 출신의 사람들을 대거 이민자로 받아들였다. 자연스레 이들은 단순 노동과 같은 일을 하면서 프랑스에 정착했지만, 정작 프랑스 사회는 이민을 받아들이는 것과 별개로 이들이 놓인 계급적 위치에 대해서는 큰 신경을 쓰지 못했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프랑스 사회의 하층민으로 전락했고, 그러한 상황이 수십 년간 이어졌다. 겉으로는 이민자들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낮은 계급으로 살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왔었다.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구성은 다양한 인종들과 이민자 출신의 선수들로 구성되거나 고위직이나 공무원에 이민자 출신의 사람들이 들어가 있는 것은 이러한 모습을 반증하는 듯 했다. 하지만 외부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이민자들의 계급적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한 갈등이 대대적으로 폭발한 것은 2005년의 대규모 소요 사태였다. 프랑스 교외에 사는 이민자 가정 출신의 소년들이 경찰을 피해 도망치다 그만 변전소에 들어가 두 명이 사망하고, 한 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건은 프랑스 전역의 이민자를 분노케 하였다. 이후 프랑스 각지에서는 방화와 경찰에 대한 폭력 같은 소요 사태가 한동안 멈추지 않았고 몇 달 후에서야 겨우 사그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소요가 진정되었다고 해서 소요의 근간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대규모 소요는 프랑스의 이민자들이 프랑스에서 점점 사회적으로, 그리고 계급적으로 소외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들이 사회에 분노하고 절망하게 될 때 소요 사태 이상의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리게 되었다. 하지만 변한 것은 많지 않았다. 사회 통합에 대한 목소리는 높았지만 동시에 이민을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이후 10여 년간 프랑스 이민자들의 문제는 개선되거나 해결되지 않았다. 대신 이민자들, 특히 이슬람 문화권의 이민자들에 대한 편견이 강화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2015년,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사회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이들은 극단적인 사상에 쉽게 빠져들었고 쉽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프랑스에 남기고 말았다. 또한 이 테러가 이민자들에 대한 편견을 더욱 늘릴 것을 생각하면, 더 깊고 헤어 나오기 어려운 악순환의 길로 접어들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프랑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앞서 말했듯 유럽 국가 대부분은 프랑스처럼 노동력 수급을 위해 제3세계 국가, 자신들이 식민지로 점령했던 국가들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이민을 받았고 이제 유럽이 이민자들 없이 돌아가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이민자들의 상황은 좀처럼 나을 가능성을 보이지 않고,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적인 정서는 다시 늘고 있다. 이러한 정서를 참지 못한 몇몇 이민자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고르게 되고 다시 이는 또 다른 분노와 복수, 차별을 낳는 악순환의 계기를 만든다. 2005년의 프랑스 소요 사태와 비슷한 시기에 벌어져 충격을 낳았던 영국 런던의 폭탄 테러 사건도 파키스탄계 영국인들이 벌인 사건이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원인으로 인해 폭력과 테러의 악순환이 연이어 벌어지는 상황에 놓여 있다.

무엇이 진정으로 테러와 범죄를 막을 수 있는가

▲ 2014년에 개봉한 정윤석 감독의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는 ‘지존파 살인사건’을 통해 대형 사건과 사회 구조와의 문제를 치밀하게 파고드는 작품이다.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 역시 <논픽션 다이어리>와 마찬가지의 사고를 필요로 하는 사건이 아닐까.

그렇다면 한국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로운가. 유럽이나 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한국 역시 1990년대 아시아권 국가들에 사는 많은 이들을 ‘산업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이주 노동자를 받아들인 이래 많은 이주민들이 한국에 정착을 한지 오래다. 또한 시골 지역을 중심으로 국제결혼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이렇게 이주의 문을 연지 1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지만, 한국의 이민자들에 대한 정책은 유럽이나 미국보다도 못 한 상황이다. 사회 통합을 위한 정책은커녕 오히려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를 속속들이 제한하는 정책을 계속 시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서 ‘다문화’라는 이름아래 늦게야 한국의 이주민들을 향한 정책과 프로그램을 운용 중에 있지만 정책의 수준은 이주민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가르치고 익히게 만드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점차 이주민 2세들이 학교, 사회에 진출하며 각종 사회적 문제와 차별에 시달리고 있지만 이를 해결할만한 방안에 대해서도 내놓지 않고 있는 판국이다. 대신 늘어나는 것은 다문화 정책에 대한 반감과 함께 이어지는 이주 노동자와 이주민 전체에 대한 심각한 수준의 편견과 폭력이다. 이주민 최초의 국회의원인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에 대한 반응은 이주민에 대한 한국의 인식이 어떤 수준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그리고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가 한국에 보도된 이후 이주민에 대한 편견은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만나고, 사건에 대한 충격과 결합되어 더 빠르게 타오르고 있다. 이제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이슬람은 원래부터 폭력적인 종교이며,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종교라는 말을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총기 난사 테러가 벌어졌던 당일 염태영 수원시장은 작년 12월 수원에서 벌어진 조선족 주민의 살인 사건을 언급하며 “외국인이 많이 사는 동네에 쓰레기가 제일 엉망으로 버려진다.” “영통구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살지 않고, 화이트칼라 위주의 외국인들이 많이 살아서 데이터만 보면 안전하다.”는 말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후 염태영 시장은 11일 공식적으로 사과를 표했다. 이렇게 온,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드러나는 차별적 발언은 한국의 상황이 유럽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사회로부터 이탈될 이주민들이 늘어날 가능성도,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도 계속 가파르게 오르고 있음을 반증하는 단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심각한 단면들과 가능성을 앞에 두고서 사회 전반적으로는 물론 담론을 제시하고 살펴야 할 언론마저 깊게 보지 못하는 지점들이다. 작년 개봉한 정윤석 감독의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는 1990년대 한국에서 벌어졌던 ‘지존파 살인사건’의 분석을 통해 대형 범죄와 사회 문제가 긴밀하게 연관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농촌에 살던 6명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놓인 계급적 처지와 돈을 벌고 싶다는 욕구에 짓눌려 5명을 연쇄 살인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들과 사회 전반, 그리고 정부는 범인들의 잔학함과 끔찍함을 소리 높여 질타했지만 정작 그들이 왜 범인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묻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 사회는 ‘지존파 살인사건’으로 잔혹한 범죄의 끔찍함 이상의 것을 탐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 역시 그렇게 될 조짐을 이미 보이고 있다. 사건이 벌어진 책임이 <샤를리 에브도>에 있는지 아니면 이슬람 (극단주의)에 있는지에 대한 논쟁과 표현의 자유와 종교에 대한 논쟁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정작 범인들이 놓여 있는 처지와 상황, 근간에 대한 분석은 찾아보기 어렵다. 동시에 왜 이슬람 극단주의가 기승을 부렸는지에 대해서도 찾기 어려운 마당이다. 그렇게 모두가 도저히 답이 나올 수 없는 논쟁을 벌이는 사이에 편견과 혐오는 계속 늘어나고, 다시 그것들은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준비를 하고 있다. 대체 무엇이 또 다른 테러와 범죄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그에 대한 확실한 답은 내리기 어렵지만, 최소한 확실한 것은 지금의 논쟁들로 답을 찾기엔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지금 진정으로 필요한 시각은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놓여있는 환경과 원인을 직시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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