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대중 정당이란 말은 기묘하다. 지금, 진보정당이 충분히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것인지 대중이 진보 정당을 원한다는 것인지 일단 애매하다. 그리고 어쩌면 때마다 반복되는 그 논의는 그 모호함에 기반해 겨우 기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새정치민주연합 탈당 선언을 한 정동영 상임고문 ⓒ연합뉴스

그 애매하고 모호한 길에 정동영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들어섰다. 그는 “시대적 요구에 동참하고자 한다”고 했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대중이 진보 정당을 원하기에 그 길로 가겠다는 것으로 들린다. 지금의 위상이 어떠하건 간에 그는 지지난 대선의 유력 후보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던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의 변을 밝히며 그는 “당이 퇴화하고 있다, 중도 우경화라는 환상에 당이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다.

그의 진단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다만, 그는 정치적 선택을 했다. 그 정치적 선택은 그러나 순정한 그의 의지에서 출발했다기보다는 앞서 말했던 ‘진보적 대중 정당’을 만들겠다고 하는 이들과의 시간적 접점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대선 패배 이후 그가 보여줬던 행보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도, 그가 겪었다는 의식의 형질전환을 가볍게 보지도 않는다. 그 마저도 없이 정치로서의 정치만 하는 이들이 야당에 부지기수다. 가장 빛나던 자리에 있던 정치인이 낭인에 가까운 추락을 거듭하며, 겪었을 고뇌와 좌절은 새로운 정치적 도약의 자양분이 충분히 될 수 있다.

하지만 정동영이 그의 정치력을 통해 대중을 사로잡고, 위험에 빠져있는 진보정당을 구출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안타깝다고 할 수도 있고,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의 목표가 한 정치인의 성장이라면, 그것은 그가 경계를 넘어오며 진화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보수정당의 퇴화를 비판하며, 진보정당(이라고 주창하는 흐름)에 합류하며 그 명분으로 “2017년 정권교체”를 말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이건 기만이고 사기다.

진보적 대중정당이란 명명의 얕고 깊음, 그 수사학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논쟁은 차지하자. 그건 어차피 증명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뭐라고 의미 짓고 떠들건 간에 여기 한국 사회에서 이미 진보정당이란 걸 독자적으로 수십 년 간 해온 이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목표 역시 대중정당을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걸 누가 모르냐고 하겠지만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그야말로 극복되지 않다. 자나 깨나 ‘진보적 대중정당’을 고민하던 이들이 왜 수 십년 째 같은 돌부리에서 넘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각성이나 성찰 그리고 경험 없이 그걸 부정하고 주창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이건 정치인 정동영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를 간판으로 내세워 진보적 대중정당을 조직하겠다는 이들의 행태가 믿을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 운동의 실패를 말하는 그들은 정작 자신들이 그 운동의 주류로서 어떤 책임을 져야하는지에 대한 의식이 없다. 또한 지금 현존하는 진보정당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냐에 대한 조심성도 고려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명분이 현실의 앞이고, 당위로 복잡한 반성을 가릴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 정당이라고 하는 집단이 굉장히 얼기설기 보이고, 심지어 무계통적인 것으로 까지 보이기도 하지만 진보정당이란 진지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무슨 얘기냐면, 정동영 전 상임고문이 비판하는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은 ‘제 1야당’으로 그 존재감이 무엇이건 간에 향후 선거에서 지역성과 상대성을 기반으로 여당에 대항하는 ‘무엇’으로건 언제든 생존할 수 있다. 그 당이 직업적 야당이라고 비판받는 이유고 그것을 관료적이라고 비판하건, 무능하다고 나무라건 그 구도는 거의 깨지지 않는다. 그것을 한국 정치의 보수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정동영 전 상임고문은 정치인으로서의 거의 모든 시간을 이 보수성 위에서 구축해왔다. 그리고 진보정당에 합류한다고 밝히면서도 자신이 내려놓은 기득권에 대해 굉장한 ‘희생’을 강조했다.

▲ 야권 교체 없이 정권 교체 없다는 주장은 어떤 정당의 강화에 기여하는 것일까? ⓒ연합뉴스

하지만 진보정당의 성질은 전혀 다르다. 그가 내려 놓은 것을 그들은 가져 본 적도 없고 심지어 일관되게 비판해왔다. 진보 정치가 무엇이냐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겠지만, 최소한 그것이 보수정치마냥 처세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란 합의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진보정당은 노선이고, 논리이며, 실천으로 겨우 꾸려지는 것이지 민주당류가 아닌 것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다.

집권의 목표를 가질 수 없더라도, 고루하다고 비판받더라도, 이념의 질서를 꾸역꾸역 사수하고 그것과 현실의 관계를 헌신적인 활동으로 다투며 명맥을 유지해온 것이다. 그 첨예하고 날카로운 전선에서 조금만 이탈하더라도 곧장 ‘우리는 왜 진보정당을 해야 하는 것인가’의 회의에 직면하며 되풀이 해온 과정이다. 그 과정이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며, 비대중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유물론적 토대가 확인되지 않으면 왜 보수정치가 아닌 진보정당을 해야 하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몇 번의 집회에 참가하고, 특정 이슈에 함께 했다고 해서 이 모든 과정의 통과를 예외로 둔 채 당장의 목표를 위해 함께하는 정당은 그것이 진보이건 보수이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경험적으로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다. 민주노동당의 짧았던 성공 이후 거의 2008년 이후 거의 매년 반복되던 과정과 최근의 통진당 사태는 허약한 진보정당이 어떻게 보수 정치에 의해 활용될 수 있는 가를 입증한 사건적 사건이었다. 이 모두를 정동영이란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간판으로 덮어두고 갈 수는 없고, 정동영이란 간판은 진보정당의 강화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대중적 정치인의 합류로 진보 정당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낭만적인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는 것이라면 기만적인 것이다.

이 흐름은 그래서 차라리 최근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제1 야당 교체’와 훨씬 친화적으로 보인다.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자는 것은 제시된 목표, 위장된 타킷일 뿐이고 실제 겨냥점은 새정치민주연합을 수정, 보완, 강화 견인이다. 구호가 바뀌고, 목적을 조직하는 방식이 달라졌지만 익숙한 행로이다. 한때, 진보정당의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으로 이해되고 했던 ‘야권연대’는 결과적으로 보수적 야당의 강화에만 복무했다. 진보정당의 간판스타들이 ‘대중성’을 추구한다며 존재를 옮겨갔지만, 그건 단 한 번도 진보정당의 강화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대중적 진보정당 역시 마찬가지일 공산이 높다.

당 안에 있건 바깥에 있건 정동영 상임고문의 행보는 보수적 야당의 입지 강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회로에 서있다. 진보정당은 새정치민주연합의 반작용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환상의 회로에 ‘대중성’이란 이름으로 존재를 의탁하는 순간, 그나마 약화되고 있는 진보정당의 고유한 생존력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흡사 ‘떳다방’처럼 때가 되면 정치적 세력화를 말하는 진보판의 원로들이 그간 어떤 정치적 행보를 걸어왔는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너무나 명확한 진영의 전사들이란 얘기다. 정동영 상임고문이 보수의 논리, 보수적 정치 기풍에서 아래로 점점 더 아래로 내려왔던 과정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했고, 충분히 경외감을 품을 만한 행보였다. 하지만 그 귀결이 그래서 진보정당의 맨 앞자리에 당연히 탑승하는 것으로 정리된다면, 그건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일이다.

그동안 진보정당의 맨 앞자리에 있던 이들이 보수정당의 맨 뒷자리로 이동하는 일은 잦았다. 그들은 모두 ‘대중적 진보정치’를 말했고, ‘진보성의 대중화’로 자신을 변화를 변호했다. 그 결과가 그래서 어떠했는가. 그들 중 누가 의미 있게 살아남아 진보 정치의 대중화에 기여했는가. 이제 저리로 넘어갈 스타는 남아있지도 않다. 앞 선이 헐거워졌으니, 이제 본진마저 내주자는 주장은 당최 의도가 무엇인가. 저 쪽의 흘러간 스타를 데려다 이쪽을 새로 세우겠다는 것은 환상이다. 진보정당이 아무리 쇠락했다고 한들 '과학'이 아닌 '환상'에 의지할 순 없는 노릇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