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개인의 스타일, 박근혜 시대의 모순이 그대로 드러난 1시간 30분이었다. ‘기자를 배우로 만들어 연기를 시켰다’는 지난해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나아진 모습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여전히 하고 싶은 얘기만 했고, 국민들은 듣고 싶은 얘기를 듣지 못했다. 어떤 사안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같은 방향을 보고 있더라도 평행선을 달리고 있음이 역력히 확인 됐고, 가장 뜨거운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 12일 박근혜 대통령은 내외신 기자들과 신년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지난 해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은 미리 세워둔 각본에서 한 치의 이탈도 없던 기자들의 연기, 성의 없는 질문과 영혼 없는 대답의 엉성한 호흡으로 점철됐다. 사후 비판이 뜨거웠고, ‘소통’을 위해 대통령이 320여일 만에 공개 석상에 나선 효과는 도루묵이 되었다.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곤란과 그 곤란에 기생하고 있는 언론의 무능을 여실히 보여준 자리였다.

그리고 1년 사이 한국 사회는 정말 실체적으로 곤란해졌다. 1년 전 기자 회견에서 ‘통일 대박’을 말하던 화기애애의 분위기는 4월 세월호 참사로 싹 씻겨 나갔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정부가 보여준 대응은 어떤 걸 기대하더라도 그 이하라고 해야 할 정도의 총체적 무능의 시간이었다. 믿기 힘든 사건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비선 실세 파문은 완고하게 닫혀있던 대통령 주변 권력이 사실은 봉두난발을 한 채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에 대해 대통령은 말을 한 적이 없었고, 들어야 할 얘기는 더 많았다.

비선 실세 파문에 대해 대통령은 ‘사과’하지 않았다. 국기 문란이란 표현으로 이미 했던 유감 표명을 다시 했을 뿐이다. 사과의 어휘라고 볼 수 없는 ‘조작’, ‘이간질’, ‘허위’, ‘유출’ 같은 단어가 앞섰다. 공직 기강 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정작 그 문란의 책임은 자신을 포함 누구에게도 묻지 않겠단 뜻을 확고히 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사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했고 문고리 3인방은 “물러날 이유가 없다”고 두둔했다. 단순한 ‘의혹 제기’에 특검을 할 순 없단 입장도 확고했다. 정윤회 씨가 문체부 인사 등에 개입했단 의혹에 대해서는 “조작된 일”이라고 단정적으로 맞받았다.

결국,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대통령을 정점으로 김기춘-문고리 3인방-정윤회의 권력 구도가 존재하며, 이를 ‘해체’할 수는 없다는 점이 ‘공증’을 받은 모양새가 됐다. 질문을 한 기자는 “수석들이 일괄 사표를 내는 방법 등이 거론 된다”고 물었지만, 대통령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고 잘랐다. 새누리당 일각에서 “비선 실세가 나쁜 것이 아니다”는 언급까지 나오고 있단 점을 감안하면, 지난 해 연말 그 ‘소동’을 한 바탕 해프닝으로 남긴 채 ‘지금 이대로의’ 권력 구도가 연장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통령은 이에 대해 검찰이 “과학적인 수사를 했다”고도 표현했는데, 그 “과학적인 수사”의 검증은 이제 역사의 문제로 이르게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소통’의 문제로 제기된 세월호 참사 관련 언급에선 아예 국민 탓을 하는 모습까지도 보였다. 소통을 하려 노력을 할 만큼 했지만, ‘딱지’를 맞았다고 표현했다. 소통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제목 장사’를 위한 노림수가 너무 많이 들어 있어 대통령이 오히려 피해가기 쉬웠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이 정부의 가장 큰 ‘부재’라고 지적되는 소통 문제에 있어 대통령은 세간의 인식과는 전혀 다른 판단을 갖고 있음이 확인됐다. 대통령이 특별한 판단을 갖고 있는 문제는 소통만은 아니었다. 경기 상황에 대해서도 대통령은 “2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고 설명하며 강한 성취감과 자신감을 비췄다.

▲ 지난 해(2014년) 열린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은 '청와대가 연출한 쇼에 기자들이 배우로 동원됐다'는 혹평을 얻었다. 사진은 기자회견이 끝나고 대통령과 사진을 찍은 기자들의 모습. ⓒ연합뉴스

경제 활성화를 위한 대책과 대북 정책에선 양립될 수 없는 문제를 수단과 방법으로 혼용하는 특유의 이중성, 고유한 유체이탈을 선보였다. 대통령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공공, 노동, 금융, 교육을 구조 개혁하겠다’고 밝혔다. 선거가 없는 해라는 점의 강조는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의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읽힌다. 사회 공공성의 핵심 영역을 경제 활성화의 발목을 잡는 ‘비효율과 경쟁력 저하 요소’로 사고하는 인식이다. 너무 허술해 헛웃음이 나오려 하지만, 그 허술함이 ‘정상화’라는 독선적 방법으로 묘사된단 점에서 섬뜩하기도 하다. 이는 노동 정책을 언급하며 “네덜란드나 덴마크와 같은 사회적 대타협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한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이미 사회적 대타협을 하기 어려운 사회문화적 공안 분위기를 조성해가면서, 어떤 합의를 누구와 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인지 그 구체성을 생각하면 난감하기 그지없다.

대북 정책 역시 수년째 구호가 아깝고, 허황되다. 이유는 간명하다. 정상회담 추진이란 ‘진취성’을 점하고 싶으면서도 통진당 해산과 같은 ‘종북 몰이’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양 극단에서 대북 문제는 시궁창을 뒹구는데 대통령은 마이크 앞에만 서면 와 닿지 않는 얘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대북 문제에 있어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부터 그야말로 ‘박 앵무새’라고 해야 할 정도로 현실에 전혀 적중되지 않는 소리만 늘어놓았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었다. “한미동맹을 굳건히 유지하면서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내실화하고, 일본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면서 한·러 관계의 안정적 발전을 기해 나가며” 남북관계의 선순환을 유도하겠단 얘기는 하나마나한, 그냥 내가 다 잘 해보겠단 차원 이상의 수사가 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숨 쉬는 것마저 고통스러운 이들이 있는 현실에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은 아무런 진전도 어떠한 기갈도 되지 않았다. 미리 선정된 15명의 기자들은 정해진 범위 안에서 대통령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역할 놀이’를 끝냈다. 어떤 기자가 ‘굴뚝 위에 올라있는 쌍용차 해고자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이나 ‘오체투지를 막아서는 법적 근거’를 물었다면 대통령은 어떤 날 것의 생각을 내놓았을까. ‘북한으로 날리는 전단은 되는데, 대통령을 조롱하는 삐라는 왜 안 되느냐’고 묻는다면 대통령은 민주적 자질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대통령이 정권에 불리한 사안에 대해 계속 수사 가이드라인을 내리는 상황이 법치에 호응하느냐는 질문도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대통령 기자회견은 끝났다. 그리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 "인적 쇄신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기춘 비서실장의 사퇴 요구에 대해 "사심 없이 도와주는 분"이라며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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