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개봉한 영화 <제보자>는 2005년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논문이 조작이라는 사실을 파헤친 MBC <PD수첩>을 모티프로 해 만들어졌다. 왜곡보도로 국익에 기여하는 학자를 죽이려 한다는 비난에도, 끈질긴 취재를 통해 ‘황우석 신화’의 허구성을 밝혀낸 주인공 윤민철 <PD추적> PD의 실제 모델이 바로 한학수 PD다.

그러나 시사교양PD로서 최고의 성취를 이루어냈다는 대내외적인 평가를 받는 한학수 PD는 “저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 그게 제 소임”이라며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는데 지금은 언론인으로서 존엄성이 훼손됐다”고 호소하고 있다. 낙하산 김재철 사장이 온 이후 경인지사 수원총국, 대학 새내기들이 들을 법한 교양강좌를 수강하는 MBC 신천 아카데미, 신사업개발센터까지 비제작부서를 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9일 오전 10시, 서울고등법원 제15민사부 308호 법정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이하 MBC노조)의 170일 파업 손해배상 공판이 열렸다. 한학수 PD는 피고(MBC노조) 측 증인으로 출석해 MBC노조가 왜 170일 파업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했고, ‘언론인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 (사진=미디어스)

한학수 PD는 지난해 10월 31일 MBC가 실시한 대규모 인사에서 비제작부서인 신사업개발센터로 갔다. 2012년 MBC노조 파업 정당성을 다투는 소송에서 MBC노조 측 증인으로 출석한 지 3일 만이었다. 본인조차도 <다큐스페셜> god 편 촬영을 하고 돌아와 알게 됐을 정도로 ‘전격적’인 결정이 이루어졌고, 결국 한학수 PD는 <다큐스페셜> 방송 작업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신사업개발센터로 출근하게 됐다. 이후, MBC가 신사업의 일종으로 시작한 ‘스케이트장’ 관리를 한학수 PD에게 시키게 됐다는 언론 보도가 나가면서 ‘보복성 인사’ 논란이 심화됐다. (▷ 관련기사 : <한학수PD 능력 인정해 스케이트장 관리시키는 MBC의 현실>)

한학수 PD는 신천 아카데미로 갔던 김재철 사장 당시의 인사가 부당했다는 가처분 결정 이후에도 비제작부서로 쫓아낸 인사가 계속된 것을 두고 “이 사건 파업(2012년 MBC노조 170일 파업)은 제작자율성 훼손에 맞서고, 2014년에 일어난 일(보복인사)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취지였다. 저는 그렇게 알고 파업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재철 사장 체제 이후 너무나 힘든 시간을 겪었다며 언론인이 제작현장에서 배제되고 언론 본연의 역할을 못하는 것은 ‘참혹하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저는 20여년 가까이 MBC에서 언론인으로, PD로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제작해 왔습니다. 김재철 사장 이후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못 하게 하고, 김재철 사장 이후 경인지사 수원총국에 가서 왕갈비축제를 기획해야 했고 신천 아카데미에서는 대학교 1학년들이 배우는 일반교양과목을 배워야 했습니다. 지금 신사업개발센터에서는 뉴 비즈니스를 찾아보라는 것이 저를 너무 힘들게 만듭니다.

방송 독립을 위해 일했던 MBC 내 대다수의 저널리스트들에게 벌어진 일입니다. 근대국가가 형성되고 법치주의가 확립된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의아스럽고 괴롭습니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널리스트가 공정한 방송, 양심에 따른 보도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은 기본적인 사회의 근본 가치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오늘의 재판, 손배 가압류는 현 경영진이 철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재철 사장과 같은 경영진이 아니라면 당연히…

저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습니다. 저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것이 제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아픈 곳을 긁어주고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것이 소임이고 그렇게 MBC에서 월급을 받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부심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언론인으로서의 존엄이 훼손됐고 자존심이 짓밟혔습니다. 이런 행태가 계속돼서는 안 됩니다. 언론인이 처참하게 제작현장에서 배제되고 언론 본연의 역할을 못하는 것은 참혹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MBC의 부당인사에 대해 법원은 3번이나 가처분 결정을 내려 그 부당함을 확인한 바 있다. 한학수 PD는 “(제작현장에 있고 싶어 하는 PD를) 영업, 사업 부서로 보낸 것은 저와 이우환 PD가 최초가 아니었나 싶다”라며 “억울하다. 법원에서 몇 번이나 결정을 했는데 계속해서 경영진이 유사행위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2011년 이후 (기자, PD 등 제작인력들의 비제작부서 발령 경향이) 꾸준히 강화된 것은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자신이 가게 된 비제작부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 협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직종 변경이라는 중대한 인사를 연거푸 단행한 사측의 결정을 비판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MBC노조는 지난해 11월 서울서부지법에 부당전보 등 취소 가처분을 신청했고, 한학수 PD도 여기에 참여했다.

▲ 9일 오전 10시, 서울고등법원 제15민사부 308호 법정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의 170일 파업 손해배상 공판이 열렸다. 한학수 PD는 피고 측 출석해 MBC노조가 왜 170일 파업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했고, ‘언론인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사진=미디어스)

MBC 측 ‘불법 파업으로 인한 경쟁력 감소’ 주장

반면 MBC는 MBC노조의 2012년 170일 파업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었고, 파업 때문에 광고판매 부진 등 금전적 손실은 물론 MBC 브랜드 가치 하락 등 경쟁이 감소했고 파업 이후 MBC의 조치가 ‘그렇게까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원고 측 증인으로 출석한 노혁진 편성국장(당시 TV편성부장)은 “노조의 관행 상 파업찬반투표가 가결되어도 시기와 방법은 집행부에 일임한다고 하고, 이를 노사협상할 때 카드로 쓰기도 한다”며 당시 파업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원고 측 변호인 역시 “워낙 급하게 돌입한 파업”이라고 표현했고, 노혁진 국장은 “아마 누구도 처음에는 170일이나 파업을 하리라고는 예상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MBC노조는 2012년 1월 9일 특보에 정영하 위원장의 편지를 실어 ‘종결투쟁’을 선언했고, 다음날인 10일부터 1층 로비에서 김재철 사장 퇴진 피켓시위를 벌였다. 당시 MBC기자회장이었던 박성호 <뉴스투데이> 앵커를 갑자기 교체했을 때, 김종인 한나라당 비대위원조차 하루 만에 앵커가 바뀌는 ‘이런 MBC에 출연 못하겠다’고 한 바 있다. 1월 11일 서울MBC 대의원회의에서는 만장일치로 총파업을 결의했고, 1월 18일 특보에서는 파업 찬반투표 예고를 했다. MBC기자회가 무기한 제작거부에 돌입한 1월 25일에는 MBC 사측이 노조의 파업을 우려해 <불법 행위 중단 요구 및 파업 자제 요청>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노혁진 국장은 “그런 공문 자체를 본 적이 없다”며 “노조가 파업을 결의했어도 실제로 파업을 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찬반투표가 바로 파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2011년 12월부터 줄곧 ‘종결투쟁’을 암시해 온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특보를 보니 그런 것 같다”고 답했다.

<미디어오늘>, <기자협회보> 등 미디어전문지에서 2012년 1월 초부터 MBC노조 파업 가능성을 보도한 것을 두고는 “<PD협회보>(<PD저널>)나 <기자협회보>는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면 항상 뜻을 같이 해 왔다. <미디어오늘>은 언론노조 밑에서 나오고 저게 어디 보도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피고 측 신인수 변호사가 “<미디어오늘>이 언론노조에서 발행된 것인가”라고 재차 묻자 노혁진 국장은 “논조가 일치한다는 뜻이었다”며 번복했다. 타 언론사에서도 예측한 일을 유수 방송사인 MBC가 모른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지적에는 “파업 선언만으로 알 수 있지는 않다”고 전했다.

MBC는 <불법파업으로 인한 방송차질 현황> 표를 증거로 제시해 2012년 1월 30일부터 2012년 7월 17일까지 총 24개 프로그램에서 차질이 발생했고 방송 파행을 빚은 경우가 986회라고 말했다. 또한 코바코(한국방송광고공사) 자료를 들어 MBC만 지상파 3사 중 목표 판매액에 못 미쳤다며 광고손실액만 1040억(추정치)에 달한다고 말했다.

노혁진 국장은 간판 예능 <무한도전>을 예로 들어 “파업 전 1월 평균 시청률이 20%에 가까웠는데 2월부터 재방송하면서 반토막이 났고 3월에는 6%로 정상방송 때보다 1/3 수준으로 줄어들었다”며 시청률 하락을 설명했다.

▲ 2012년 MBC노조의 170일 파업 당시의 모습 (사진=미디어스)

원고 측 박철 변호사는 반대심문에서 시종일관 한학수 PD의 답변을 끊고 무리한 주장을 펼쳐 지적을 받기도 했다. 신천 아카데미의 수많은 교육과정 중 <SNS를 활용한 미디어마케팅>, <종편 채널 현황과 전망> 등 소수 과목만 언급하며 언론인들이 듣기 적합한 강의로 구성돼 있다고 주장하거나 ‘사장의 사전 시사’를 결과적 측면만을 비교해 같은 것으로 판단했다.

<PD수첩> 황우석 편 파급력을 고려해 시사교양 PD들, 보도국을 거쳐 PD들의 동의 아래 담당 국·부장이 동석해 이루어진 최문순 사장 당시의 시사(방송 전 미리 보는 것)와, PD들을 비롯한 내부 구성원들의 반발에 강행된 김재철 사장의 시사를 동일선상에 둔 것이다. 또한 “PD들의 난독증, 우울증엔 민감하고 남의 고통에는 둔감하군요?”, “남북경협 관련해서는 시각차가 워낙 크니 토론하자고 할 것 같으니 안 하겠습니다”, “그렇게 따지고 싶다면요” 등 한학수 PD의 답변에 이의를 제기하는 개인 의견을 지속적으로 덧붙였다.

‘김재철 사장의 보도와 인사에 대한 전횡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업을 하게 됐다’는 입장과 ‘예상치 못한 불법 파업으로 회사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는 입장이 팽팽히 갈려 이날 공판은 3시간 30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다음 공판은 오는 23일 오후 2시 서울고등법원 서관 308호에서 열린다. 이전에 마무리 짓지 못한 최일구 전 MBC 앵커에 대한 반대심문이 진행되며, 원고 측 증인으로 김현종 전 <PD수첩> 팀장이 출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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