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고 열흘이 지났다. 하지만 책상에 놓인 새해 달력을 쳐다봐도, 업무서류의 빈 칸에 바뀐 연도를 적어도 2015년이란 숫자는 낯설기만 하다. 달력이 통째로 바뀌거나 네 자리 연도의 끝자리가 바뀐들 아무 감흥이 없는 것은 그만큼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굴뚝에 올라있는 이창근의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 오는 11일은 '굴뚝데이'로 12시부터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동시다발 1인 시위가 진행된다.

2014년이 유독 길어서인가. 계절이 바뀌고 달이 바뀌어도 끝을 알 수 없이 기다리기만 했던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봄, 여름이 가고 겨울이 다 되도록 특별법의 제정을 바라며 KBS 앞 현관에서, 청와대 앞 도로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벌써 광화문 농성을 시작한지 270일이 되어 간다. 분할 매각과 공장 가동 중단, 그리고 대량해고에 맞서 차광호씨는 구미 공장 굴뚝에서 228일을 넘기고 있다. 그 뿐인가. 사측의 정리해고가 정당했다는 대법원의 판결을 뒤로 하고 쌍용 자동차의 두 노동자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70M 굴뚝에 올라 29일째를 맞고 있다. 다행히 광화문 전광판에서 해고자 복직과 구조조정에 반대하며 50일의 농성을 벌였던 두 노동자는 땅을 밟았지만, 씨앤앰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177일 동안 노숙 농성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본의 시간, 권력의 시간

이 기다림의 시간을 시계와 달력의 시간으로 잴 수 있을까? 고통과 외로움을 견디며 조금이라도 달라진 상황에 기대를 걸다가도 다시 좌절하는 희망고문의 시간은 지상의 시간과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는 또 다른 시간이 있었다. 회사의 매각 협상이 임박한 시점, 사측이 요청한 경찰의 강제 진압이 예정된 시간, 언제라도 엎어질지 모르는 노사교섭의 회차가 그랬다. 이 시간은 우리의 기다림과는 전혀 다른 ‘그들’의 시간, “자본의 시간”이었다.

자본만 그랬을까. 다른 기다림들도 그들의 시간만을 바라보지는 않았던가. 여야 간 합의가 이뤄진다면,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한다면, 나아가 대선에서 정권이 바뀐다면 우리의 기다림은 더욱 짧아지리라 기대하지 않았는지. 정치가 아니더라도 행여 마지막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던 법원의 판결 또한 그들의 시간이었다. 항소심에서 한숨을 돌리면 다시 대법원으로 가야했고, 판결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자본의 시간 뿐 아니라 “권력의 시간”도 그들의 시간이었다.

그들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이렇게 달랐다. 똑같이 해가 뜨고 해가 지며, 계절이 바뀌고 해가 달라져도 그들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네 자리 숫자만 같았을 뿐 전혀 다른 시간이었다.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의 시간, 씨앤앰 전광판 노동자들의 시간이 그랬고, 이제는 구미와 평택에 있는 굴뚝의 시간들이 그렇게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그들의 시간이 우리와 다른 것은 그들이 권력과 자본을 갖고 있고, 그래서 그들의 시간에 우리의 시간이 끌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들의 시간은 눈앞에 보이는, 손에 쥘 수 있는 무엇을 향해 달려드는 시간이다. 인수해야 할 회사가 있고, 장부에 기록될 액수가 있으며, 되찾아야 할 권좌가 있다. 모두가 경험해 보았거나 맛보았던 대상들의 확장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 하염없는 기다림의 시간은 지금 가진 것을 지키려는 생존의 시간이며, 그 끝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면서 끝없이 헤매는 갈망의 시간이다.

유토피아라는 우리의 기차는 우리 시간표를 갖는다

언젠가 기형도는 이렇게 썼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말이다. 사랑을 찾아 헤매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저 헤맬 뿐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란 정서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향한 것이라도, 앞으로 만날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사라지지 않는 힘이다. 사랑할 대상이 없다고 해서 사랑의 정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생존을 위한 시간이며 갈망하는 시간인 우리의 시간이 끝을 모르는 기다림으로 점철된다면, 그 기다림의 대상 또한 사랑의 대상과 다르지 않다. 다시 돌아갈 직장은 이전과 다를 것이고, 안정된 고용은 비정규직의 인생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일 것이며, 아이들이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밝혀질 때면, 우리의 삶의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경험한 적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그 무엇을 찾아가는 우리의 정서와 의지는 블로흐(Ernest Bloch)가 “희망의 목표 없는 진행”이라 부른 바로 그것이다.

아직도 희망을 말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이 그들의 시간과 다른 이유, 우리의 시간이 그들의 시간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힘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힘이기에 누군가 외로이 의지만으로 그것을 간직할 수는 없다. 그들의 시간이 찾는 것은 확실한 대상이며, 자본과 권력이라는 사물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뚜렷한 대상을 모르는 희망의 진행이기에 더 많은 희망의 확인이 필요하다. 그들은 사물을 원하지만, 우리는 사람을 원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시간과 그들의 시간은 다를 수밖에 없다. 수많은 이들이 서로에게서 확인하는 희망의 정서는 그들의 시간만을 바라보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계와 달력의 시간, 자본의 시간, 그리고 권력의 시간과 이제는 작별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가 꿈꾸는 신년(新年)이란 그래서 새로워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희망이 모인 유토피아라는 기차는 그들의 시간표가 아닌 우리 자신의 시간표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기차가 우리 역의 시간표에 맞춰 정차하도록 말이다.

김동원 _ 공공미디어연구소 연구팀장. 미디어의 정책과 이슈에 대한 글쓰기로 밥벌이를 한다. 미디어에 대한 단순한 한 가지 관점만을 고수한다. Media “and” Society가 아니라 Media “in and through” Society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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