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즈>의 위근우 기자가 트위터에서 “특히 세월호 사건 이후, 좌든 우든 인간에 대한 믿음이나 선의에 대한 믿음 자체를 잃어버린 이들을 보는 게 보수들의 패악질을 보는 것보다 더 힘들다”면서 <내일을 위한 시간>을 추천했다. 위근우 기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개봉 전부터 일찌감치 ‘새해 첫날 볼 영화’로 점 찍어두긴 했지만, 이 말이 큰 울림을 주면서 내 감상에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병가 후 복직을 앞두고 ‘시험’에 든 산드라의 이야기이다. 물론 시험에 든 이는 산드라만은 아니다. 그녀의 동료들은 그녀의 복직과 보너스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일방적이고도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영화는 14명이 보너스를 선택했다는 결과를 애초 영화의 시작점으로 배치한 뒤 철저히 산드라의 뒤를 쫓으면서, 영화를 동료들이 아닌 산드라가 통과해야 하는 시험의 여정으로 풀어나간다. 누가 자기가 받을 보너스를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이의 복직을 돕겠는가? 산드라는 이 ‘상식’에 가까운 판단에 도전해야 한다. 월요일 아침 재투표 때까지, 보너스를 선택했던 이들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 이를 위해 14명의 동료를 만나 똑같은 이야기를 하며 사정을 해야 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화의 원제대로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Deux jours, une nuit)’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헌데 우울증의 회복 끄트머리에 서 있던 산드라는 이 과정을 시작하는 것부터가 버겁다. 무력감과 배신감에 그저 울기만 하다가 스스로를 피해자화하며 지레 자포자기를 한 뒤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영화 초반 산드라의 모습이 딱 그랬다. 의사가 끊으라 했던 약을 계속 먹어대면서 가까스로 길을 나선 것도, 복직에 표를 던졌던 친구와 남편의 강권에 가까운 격려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치러야 할 시험은 표면적으로 동료들의 마음을 과연 돌릴 수 있느냐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직접 행동에 옮길 수 있는가, 그리고 배신감과 무력감을 넘어서 동료들의 양심과 선의에 대한 믿음을 긍정, 혹은 회복할 수 있느냐이다.

해서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매우 단순한 플롯과 구성(동료들을 하나하나 만나 설득하는 장면의 반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폭발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권리가 짓밟힐 때 사람들은 당연히 분노하지만, 직접 나서서 정면 대결을 하며 싸우기는 쉽지 않다. 또한 나에게는 섭섭하지만 그의 입장에선 할 만한 선택을 한 친구나 동료들을 열 명 이상 직접 대면하는 일도, 그들에게 반복적으로 나의 처지를 알리고 요구를 하는 것(그것은 결국 ‘아쉬운’ 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산드라 역시 평범한 우리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몇 번이고 포기하려다가 겨우 마음을 추스리거나 남편의 등쌀(!)에 떠밀려 나가는 식이다. 그런 산드라가 동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만날 때마다, 관객인 우리는 그 동료가 과연 산드라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증을 갖게 되고, 기대를 갖게 된다. 산드라나 관객인 우리나, “과연 남의 복직을 위해 자기 보너스를 포기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회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답은 예스냐 노냐 둘 중 하나일 뿐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그 돈이 절박한 건 동료들 모두 마찬가지다. 그런데 동료들마다 사정도, 그 대답을 밝히는 과정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집에 없는 척하고, 누군가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쿨하게 거절한다. 뜻밖의 폭력 사건이 나기도 한다. 심지어 산드라를 비열하게 심리적으로 공격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산드라의 손을 꼭 부여잡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동료도 있다. 산드라는 이들의 반응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가 치르는 시험에는, 당장의 생계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자리’만큼이나 중요한 것, 즉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의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동료들의 각각의 반응을 배치한 순서는 웬만한 장르 영화의 스릴러 공식을 능가할 정도로 치밀하다. 그에 따라 관객인 우리 역시도 점점 큰 스릴을 느끼며 산드라에게 온전히 감정 이입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재투표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이가 계약직이자 아프리카계인 젊은 알퐁스인 데에서 스릴은 최대점을 찍는다. 동시에 감독의 정치적 지향점으로서의 ‘연대’의 의미 역시 최대점을 찍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재투표가 치러지는 장면을, 우리는 터질 듯한 가슴을 안고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볼 수밖에 없다.

다큐멘터리처럼 인물들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거의 컷 없이 화면을 연결하는 건 다르덴 형제뿐 아니라 소위 ‘다큐멘터리 기법을 사용하는’ 많은 감독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르덴 감독의 화면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진다. 시종일관 깨알 같은 유머가 박혀 있고 TV 드라마적 편집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그래서 기본적으로 ‘코미디 장르’로 분류되는 켄 로치 감독의 영화들과 달리,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들은 주로 인물들의 눈높이에서, 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계속 그의 뒤를 쫓아간다. 비전문 배우와 신인들을 많이 기용하기도 했지만, 조연으로 포진해 있는 전문 배우들도 그의 영화 안에서는, 마치 카메라가 계속 따라붙어 어느 순간 카메라가 있는 듯 없는 듯 너무 익숙해진 평범한 일반인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 어린 피로에 찌든 표정이, 어깨에 지워진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어쩌면 이것은 “그 무거운 35mm 카메라를 들고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그러다 그 스타일 그대로 극 영화로 전향했던” 형제 감독에 대한 내 선입견일 수도 있겠으나… 반면 <내일을 위한 시간>은 다르덴 감독이 처음으로 ‘누구나 알 만한’ 세계적인 스타를 기용한 첫 작품이다. 특출난 미모를 지닌 마리옹 코티아르조차, 다르덴 영화에서 우리 주변서 가끔 볼 수 있는 “좀 예쁜” 옆집 공장 노동자 정도로 보이는 건 좀 놀라운 일이다. 이런 스타일의 영화에서 자칫 튀기 쉬운 스타 배우의 기용이, 이 영화에서는 미학적으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전문 배우의 능숙한 연기를 끌어낸 결과가 됐다. 무엇보다도 다르덴 영화의 스타일에 낯선 이질감과 부담을 느낄, 그러나 누구보다 다르덴 영화를 봐야 할 관객들에게 진입 장벽을 낮춰준다.

▲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유난히도 끔찍한 사건 사고들이 많았던 2014년, 특히나 세월호 사건을 기점으로 우리는 좀처럼 타인의 선의를,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스템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커튼으로 로프를 만들었던 어른, 친구들을 구하러 다시 물로 들어갔다가 끝내 주검으로 나온 아이들, 갑판에서 울고 있는 꼬맹이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안고 구조선으로 뛰었던 소년, 자기보다 고작 대여섯 살 어린 ‘제자’들을 구하려다 끝내 주검으로 돌아온 2, 30대 청년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눈물을 흘렸으면서도 우리가 희망을 좀체 갖지 못하는 것은, 정작 그들을 지키고 구하는 게 의무였던 이들이 손 놓은 채 아무것도 못 하거나, 그들을 버리고 제 목숨부터 구하는 광경을 같이 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 비극이 우리 어른들이 만든 지금 세상에서 필연적인 결과물일 수밖에 없음을 자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족을 잃은 유족들을 누구보다 위로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일’을 해야 할 이들이, 오히려 유족들을 떼강도로 모는 광경들을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요구를 위해 나선 유족들에게 집단적으로 손가락질과 비난과 조롱이 퍼부어지는 광경을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2014년은 내게 평생에 가장 힘들고 지옥 같은 기간이기도 했는데,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지고 있는 순진하고 나이브한 인간과 선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 믿음이 배반당했다는 슬픔과 분노, 이후 인간에 대해 갖게 된 환멸, 선의에 대한 끝없는 의심과 회의 때문이었다.

그러나 좀 낯뜨겁게 고백하자면, 새해 첫날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보며 나는 큰 위로를 받았고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 이것은 마치 종교적인 체험과 같다. 인간에 대한 환멸과, 세상에 대한 무력감과, 비극과 이후 펼쳐진 아수라장을 지켜보며 얻은 깊은 슬픔을 통과한 후, 이 영화를 보고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사려 깊은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스스로를 고문하는 기만의 희망이 아닌, 진짜 희망. ‘여전히 놓지 못하는’ 희망이 아니라, 우리가 ‘감히 만들어가야 하는’ 희망. 증오와 절망과 분노보다, 희망과 믿음이 더 힘이 세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의 선의를 믿는 한, 그리고 그 요청에 반응하는 한, 거기에 진짜 희망이 존재한다. 인간은 누구나 타고난 것이든 후천적으로 학습된 것이든 선의를 가지고 있다. 이 선의는 다만 종종 큰 위기에 처하고, 이 처참한 세상에서 손쉽게 망각, 포기, 혹은 부정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이 선의를 부활시키는 것은 결국 그것이 존재한다는 긍정이며, 믿음이다. 이 믿음은 오히려 ‘용기’에 가깝다. 자포자기와 두려움을 이기는 것, 이기심을 인간의 당연하고도 가장 특징적인 속성으로 믿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이기심을 정당화하지 않는 것, 거절과 상처가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나아가 거절과 상처에 대한 공포로 ‘냉소’라는 손쉬운 방어막을 선택하거나 전파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사람의 선의를 믿는 것, 그리고 그 선의에 요청을 보내는 능동적인 행위까지. 용기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과정들이며 그 자체가 모두 용기의 과정이다. 그 요청에 선의로 반응하는 행위 역시 용기다. 그 용기가 우리 스스로를 구원한다. 그리고 다른 이를 구원한다. 더불어 더 큰 선의와 용기를 전파시키고 만들어낸다. 그것이 내가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보며 얻게 된 희망의 정체이자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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