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의 일생을 무대로 옮긴다고 하자. 많은 경우 위인의 위대한 업적을 중점적으로 묘사하지 그의 인격적인 결함은 드러내지 않는 방식의 연출을 할 것이다. 가령 2차 세계대전의 화마에서 독일 나치의 마수로부터 영국을 지킨 영국수상 처칠을 무대에서 묘사한다고 치자. 처칠의 불굴의 정신을 무대에서 극대화하지, ‘나는 나치와 싸운 것이 아니라 처칠과 싸웠다’는 처칠 주위에 있던 이들의 고백처럼 처칠의 인격적인 결함은 감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다>는 위인전의 전형적인 공식을 보란 듯이 비켜간다. 안중근 의사에게는 안준생이라는 아들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아버지의 위업과는 정반대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사과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손자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친일 행적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인물이다.

대개 이런 방식의 위인전의 패턴을 따른다면 이런 안준생의 수치스러운 행적은 무대에서 감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다>의 원작자 정복근 작가는 위인전의 전형적인 공식으로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묘사하는 걸 지양한다. 안준생이 왜 아버지의 위대함과는 반대로 친일파의 행적을 살았는가 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반대의 행적을 통해 ‘대비효과’로서 안중근 부자를 소개하고 있었다.

▲ 연극 ‘나는 너다’ ⓒ돌꽃컴퍼니
그렇다고 안준생만 친일파로 밀어붙이지도 않는다. 아버지와는 반대의 못난 아들인 대비효과가 다가 아니다. 왜 안준생이 친일파라는 오해를 살 법한 행동을 했는가를 묘사함으로, 안준생의 친일 행적이 안준생이 의도했다기보다는 일본의 언론 조작에 휘말렸다는 점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너다>는 잘난 아버지와, 아버지의 명성에 먹칠을 한 못난 아들이라는 ‘대비효과’로 바라보기 쉬울 테지만, 그 이면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끔 꾸민 일제의 언론 조작이라는 간교한 술책이 있던 거다.

그동안 친일파 아들로 알려진 안준생에 대한 극 중 변명, 면죄부를 무대를 통해 제공함으로써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자란 안준생에 대해 세인이 모르던 진실을 무대를 통해 밝혀준다. 안중근 의사의 부끄러운 아들이 아닌, 일제에 의해 왜곡된 진실과 대면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나는 너다>의 저력이 아닐까 싶다.

▲ 연극 ‘나는 너다’ ⓒ돌꽃컴퍼니
2010년 초연 당시 무대 경험이라는 전혀 없는 송일국을 캐스팅한 것은 윤석화의 ‘신의 한 수’였다. 초연 당시 2세가 없던 송일국을 위해 매일 배우들이 기도한 결과 지금의 대한-민국-만세라는 삼둥이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너다>를 통해 삼둥이를 품에 안게 된 송일국은 이번에 출연 제의가 들어왔을 때 기꺼이 <나는 너다> 재연에 출연하게 되었다. <나는 너다>는 지금의 삼둥이가 있게 만들어준 공연이면서, 동시에 삼둥이가 태어남으로 이번 재연에 송일국이 출연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우로보로스의 순환과도 같은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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