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사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 드는 느낌은 뭔가? ‘구시대 유물’ ‘오래된 화석’ ‘먼지 풀풀 날리는 책’…. 한마디로 낡고 오래됐다는 느낌이다. 다른 한 축의 느낌 다발도 있다. ‘투사’ ‘비범함’ ‘거창함’ ‘역사’…. 나 같은 사람은 기를 써도 죽기 전에 걸려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얘기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필화사건이 뭔지도 잘 모른다. ‘필’로 ‘화’를 당하는 건가?
‘필화(筆禍) : 발표한 글이 법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제재받는 일’(국립국어원 뜻풀이).
역시 고색창연하고 묵직한 게 낯설기만 하다. 적어도 지난해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후 필화는 지극히 21세기적인 사건이자, 우리 삶에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는 ‘친숙한’ 사건이 됐다. 정부 정책에 문제를 제기한 프로그램 제작진은 원본 테이프를 다 내놓으라는 검찰의 윽박지름을 듣는 상황에 처한다. 정권과 어깨를 같이 하는 보수언론을 꾸준하게 비판해온 ‘완소’ 프로그램도 ‘폐지’라는 벼랑에 몰려 ‘오늘 내일’ 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언론쟁이들이나 문필가들 정도가 겪을 수 있을 것 같은 필화 사건은 평범한 시민들이 무시로 겪는 사건이 되었다. 네티즌이 인터넷에 올린 글과 사소한 댓글이 사정기관에 의해 검열되고, 이 가운데 글을 쓴 몇몇은 경찰이 찾아와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헤집어 놓고, 외국에도 나가지 못하는 험한 꼴을 당한다. 피해업체의 고발이 없는데도, 광고주 불매운동 관련 글을 쓴 일부 네티즌은 구속까지 된다. 필화사건의 죄명은 본래 ‘괘씸죄’인가?
유학자 황현의 국권 피탈을 통탄하는 내용의 한시가 1910년 10월 경남일보에 실린 후 이를 조선총독부가 문제삼아 정간 처분을 받은 ‘경남일보 필화사건’, 1959년 경향신문의 칼럼 ‘여적’에 실린 글들로 관련자들이 내란선동혐의로 기소되고 경향신문이 폐간명령을 받은 ‘여적 필화사건’…. 우리가 지금 필화사건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근대 언론사 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과거 필화사건을 뒤져 보면 더욱 실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필화사건의 대상에서 언론인이 열외가 된 것도 아니다. 언론인도 시민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나름대로 쓴소리의 고유한 발언권을 보호받던 언론인들조차 보호장치가 사라졌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젠 정부의 정책에 반하는 보도·프로그램을 내보내 정부에 ‘밉상’으로 찍힐 경우 석고대죄(사과방송)를 시키는 것도 모자라 멀리 귀양(좌천성 전보/타지 발령)까지 보낸다. 검찰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한두 달 숙직실 새우잠도 감당해야 한다(김보슬·이춘근 전 <PD수첩> PD).
이명박 정부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필화사건을 남발한 효과는 광범위한 심리적 효과로 이어지고 있다. ‘설마 다음엔 내 차례?’ 너나 할 것 없이 글쓰는 것에 대해 알게 모르게 공포를 내면화하고, 자기검열을 하기도 한다. 약발이 먹혔다는 얘기다.
이명박 시대 필화사건의 대표적 희생양인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http://cafe.daum.net/stopcjd, 이하 언소주)도 소속 회원들이 많이 위축됐다. 카페 운영진인 이정기 언소주 사무처장(현재 불구속 기소)은 “실제로 오프라인에서 회원들을 만나면, ‘검찰의 행태가 치졸하긴 하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될까봐 글 올리기 무섭다’ ‘댓글 달기도 두렵다’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며 “이번 사건에 연루되면서 많이들 지치고, 먹고 사는 문제에도 지장이 오니까 위축되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현장 언론인들은 꿋꿋하지만, 언론사 경영진들은 사정이 다르다. <PD수첩> 오동운 PD는 “이명박 정부 출범 전과 후에 있어서 프로그램 만드는 데 차이가 있진 않다”면서도 “다만 내부보다 외부, 그러니까 MBC 경영진 쪽에서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다”고 밝혔다.
전 청와대 출입기자 A씨는 “노무현 정부 때는 사전 엠바고 요청이 들어오면 기자단이 논의를 해서 수용 여부를 통보하는데 이명박 정부는 자기가 먼저 말실수를 해놓고 사후 비보도 요청을 한다. 엠바고는 몇개사 중에서 1개사라도 반대하면 성립이 안 되는데, 현재 청와대 출입기자단에서는 그게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조·중·동·연합 등 일부 기자들이 춘추관장 등과의 지나친 친분을 유지해 청와대 출입기자단 사이에서도 불신이 알게 모르게 흐른다”고 밝혔다.
출입기자 B씨도 “엠바고를 깬 매체에 대한 기자단의 징계는 비판 언론에 불이익을 준다는 비판을 받을 만한 소지가 충분하다”며 “당시 기자단 내부에서도 일부 기자들의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결국 징계가 내려졌다”고 말했다. 필화사건의 책임 한 부분은 언론인들 스스로가 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바람보다 먼저 눕는 게 풀잎이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힘 또한 맞바람이 아니라 풀뿌리에서 나온다. 대한민국 언론인과 시민들은 정부가 동원하는 각종 사정기관의 탄압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탄압은 곧바로 ‘싸움의 동력’으로 되돌아오는 듯하다.
김대열 언소주 회원 역시 “사법권한이 없는 검찰이 처벌근거 조차 없이 무작정 네티즌을 협박하고 그러면 무서워서 수그러들 줄 알았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며 “MB정권 아래선 우리가 한 행동이 잠시 유죄가 될 수 있겠지만 나중엔 결국 무죄가 될 것”이라고 희망을 이야기한다.
나명수씨도 “현재 인터넷 여론이 위축돼있지만 전혀 위축될 필요 없다. 검경이 조사나 협박은 할 수 있겠지만 실정법을 통해 구속력을 가지는 행위는 할 수 없다”며 “물론 이렇게까지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상황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반 이명박 투쟁을 해나가겠다.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 7월까지 <미디어포커스> 진행을 맡았던 김현석 KBS 기자도 “이명박 정부 출범 후 프로그램 폐지에 대해 약간의 위기감이 있긴 했으나 프로그램 만드는 데 있어서 위축된다든가 하는 건 전혀 없었다”며 “끝까지 할 말은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밝혔다.
순식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이들은 지금 절망을 넘어서 희망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