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를 불러내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이제 비평적 착실함은 있을지 몰라도 더 이상 새롭진 않다. 오히려 90년대 대중문화의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지상파 방송이 그 시대의 기록자가 아니었던 케이블 방송사에 <응답하라> 시리즈를 뺏겼던 것이 더 놀라운 사실이었는데, 그 무렵 지상파 방송의 처지가 그걸 감당할 수준이 못됐기에 그냥 넘어갔다. 97년과 94년에 응답을 요구했던 건 벌써 작년, 재작년의 일이다.

한참 지나, <무한도전>이 다시 90년대를 불러냈다. 다소, 뜬금없었다. 애초 그 기획이 얼마나 정교한 계산에서 출발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시청자에게 공개된 방송만 보건대, 박명수와 정준하의 노래방 열창에서 시작한 단출한 아이디어가 전문가들의 각색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무한도전’이 다소 무모해보이더라도 대중문화의 트렌드 세팅과 관련해 매우 정교한 행보를 보였단 점에서 즉흥적인 것으로만 볼 순 없을 것이다. 더욱이 <무한도전>은 90년대를 호명하며 접미어로 ‘(나는) 가수다’를 택했다. <나는 가수다>는 ‘포맷 수출’이라는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해내며 MBC 매출에 혁혁한 공을 세운 프로그램이다. 2015년 대중문화의 키워드로 ‘차이나 머니’가 거론되는 때에, 던져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는 여러 의미에서 비범하다.

그래서 ‘토토가’는 흥겹게 ‘복고’를 ‘향수’하고 끝내는 차원을 넘어 생각해볼 지점을 던진다. 누가 그 프로그램에 전율적 ‘열광’을 보이고 있는지 ‘주체’의 문제가 있고, 대중문화 전체와 영향을 주고받는 가장 센 프로그램이 뒤늦게 90년대 호명에 합류한 이유가 무엇인지 ‘의미’의 문제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90년대는 그럼 이제 어떻게 활용될 것인지 ‘전망’의 문제가 있다. 감상을 나누는 것을 넘어서는 비평이 상실되어가는 시대이지만, 한 편의 예능을 보고 너무 정색한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토토가’는 가로질러 고민해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흘러간 가수들에 전율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토토가’에 열광하고 있는 이들은 이미 2012년에 ‘1997년’에 응답을 요구하며 ‘강남스타일’로 놀아봤던 바로 그들이다. 97년에 응답을 요구했던 이들은 그 이전 세대와 어쩌다보니 완전히 단절됐지만, 집단 내의 균질성은 역설적으로 그래서 매우 보편적인 이들이다. 그들은 어쨌거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통로로 대중문화를 흡수했다. 내년에 마흔이 되는 76년생 정도부터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했던 1992년 무렵 TV를 보기 시작한 80년대 중후반 태생의 집단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베이비들이고, 사실상 지금 존재하는 모든 하위 문화적 현상들을 집단 경험으로 공유하고 있는 첫 세대이다. 사회 전체가 거품에 취해있던 시절의 세례를 마지막으로 입은 세대이기도 하다.

그들이 청소년기를 보낸 90년대는 사회 전체가 얼추 다 잘 될 것이란 의지로 충만하던 때였다. 신분 상승의 에스컬레이터는 계속 작동할 것 같았다. 아빠들의 지갑은 지금보다 훨씬 두꺼웠고, 엄마들의 의지 역시 이전 세대에 비해 훨씬 세련됐다. 그 아이들은 뭐든 적극적으로 소비할 수 있었고, 문화적 소비를 통해 서열을 정하고 존재를 입증하는 또래 문화를 가질 수 있었다. 그 거품은 97년 IMF로 박살났다. 이후 그 세대들은 버려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전혀 ‘취급’을 받지 못했다. 이 세대가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무렵 대유행한 ‘88만원 세대’ 담론이 이 세대를 비껴 뒷 세대에게 꽂혔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세대는 지금 유행하는 거의 모든 것들의 원형질을 만들어낸 이들이다. PC를 기반으로 하는 모든 행위에 여전히 가장 능숙하고 적극적이다. ‘한류’로 집약되는 콘텐츠에 대한 반응성 역시 이 세대를 통해 완성됐다. 문화를 소비적 서열로 귀결시킨 악순환 역시 이 세대가 시작한 질서였다. 문화적 전위였지만, 사회적 소외를 경험하며 문화적 자산을 과시할 기회를 잡지 못했던 세대. 앞 세대의 순항을 목격했지만 끝내 도래하지 않을 경제적 번영을 빨리 인정하며 냉소에 익숙해진 세대. 바로 그들이 지난 토요일 전율했다.

대단함을 넘어 대변하는 프로그램이 된 무한도전

진심으로 기꺼이 대단하다. 그리고 그 대단함은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대단하게 봐주는 이들을 향한 위무로 존재하는 것 같단 느낌마저 준다. 고작 예능 프로그램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무모한 도전’이라는 체력전으로 시작된 <무한도전>은 멤버들의 나이가 완숙한 중년이 될 때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제 그 늙어감마저 재료로 사용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기념비적인 400회를 지나 지금 당장 그만두어도 기꺼이 축복하겠단 축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무한도전>은 시간을 과거로 ‘리턴’시켰다. 체력전 시절의 백미였던 차승원을 불러내 더 센 체력전을 감행하며 지금의 쇼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환기했다. 그리고 ‘토토가’다. 쇼의 시공간축을 아예 프로그램 이전으로 옮겼다. 지상파 방송의 본방 시청률이 지상파 전성시대의 1/3만 나와도 만족스러운 때다. <무한도전>은 어떻게 하면 10%대의 안정적 시청률을 유지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짚어냈다.

누가 우리를 쳐다봐주고 있는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영민하게 짚어내는 실력은 확실히 쇼의 미덕이다. 그 쇼를 보며 나이를 먹은 이들과 함께 ‘우리들만의 추억’을 부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축복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들이 90년대에 대한 인정 투쟁의 시작이었다면, <무한도전>의 기획은 그래서 명확한 ‘타킷 오디언스’들에게, 본격적으로 그 시절을 재향유 하자는 제안으로 읽힌다.

이 기획은 쇼의 의미에선 정말 대단하다. 하지만 <무한도전>의 위상을 감안할 때, 그 의미가 단일할 것인지는 확신이 안 선다. 물론, <무한도전>이 왜 그런 것 까지를 모두 감안해야 하는가의 질문이 있을 순 있다. 하지만 <무한도전>이 지금껏 ‘대단하다’는 1차원적인 감상을 넘어 방송 쇼의 지형 자체를 바꿨으며, 가장 오래되었음에도 여전히 가장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프로그램으로 대접받고 있단 점에서 이 기획의 의미는 논쟁적일 수 있다.

<무한도전>이 설정한 ‘타킷 오디언스’는 아직 어떤 의미에서도 황금기를 맞지 못했지만, 끝내 자신들의 황금기가 도래하지 않을 것임을 아는 이들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 문화소비의 구매력을 갖추고 있고, 지금 존재하는 문화적 것들의 원형을 향유해봤던 점에서 문화적 힘도 갖고 있다. 이제 갓 가정을 이뤘거나, 월 단위 생활이 가능한 돈을 벌기 시작한 이들에게 벌써 ‘추억’을 권하기 시작한 사회의 분위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는 좀 더 복잡한 논쟁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게 문화적 ‘정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새로운 것을 가장 역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던 구조에서 자라난 세대들이 가장 빨리 익숙한 것에만 반응하는 집단이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래서 채 10년도 안 된 ‘기억’을 소환하는 쇼의 기획은 한 두 번은 신선할 수 있겠지만, 반복 될수록 문화적 지형이 그만큼 퇴행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선택 밖에는 안 된다.

90년대가 활용되는 방식과 그 활용의 적절성에 대하여

지금 <무한도전>은 예능뿐만 아니라 아예 MBC라고 하는 방송 전체를 짊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NS에 횡행하는 ‘MBC는 무한도전 밖에 볼게 없다’는 말에서는 과장이 아니라 어떤 절실함마저 느껴진다. 훗날 지금의 MBC는 매우 역사적인 시간으로 적힐 것이다. 공영방송으로서의 사회적 가치와 플랫폼의 효율적 기능 그리고 그 모두를 포괄하는 사회적 가치와 의미에 있어 MBC는 철저한 상실의 경로를 밟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한도전>은 그 자체로 MBC이며, 사실상 마지막 남은 MBC의 유산이기도 하다.

케이블 방송의 약진 이후 지상파 예능의 장르적 한계가 두드러져 보이는 현실에서, ‘토토가’의 성공은 ‘90's 쇼’의 본격적 예능 장르화를 예감하게 한다. 방송사 입장에서 그 쇼의 장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핫한 아이돌들에 비해 출연진들의 충성도가 높을 것이며, 인지도에 비해 출연료는 쌀 것이며, 더 독하게 그리고 선정적으로 연출해도 될 것이다. 거실 TV를 시청하는 연령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때에, 세대적 안배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TV의 노쇠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너무 이른 우려일 수 있겠으나 역시 한류다. 90년대는 동력이 떨어지고 있는 한류에 손쉬운 동기가 될 수 있다. 판에 박은 아이돌이 아닌 그나마 음악적 다양성과 서사가 존재하는 90년대 가수들의 해외 진출은 충분히 매력적인 문화 사업이다. 그러나 흘러간 강물을 퍼와야 한단 점에서 이 사업을 ‘코디’할 수 있는 주체는 현실적으로 지상파 방송이 가장 경쟁력이 높다. <무한도전>이 그 가수들을 다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처럼, 지상파 방송은 이 포맷의 쇼케이스를 개최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주체다. 무엇보다 90년대 가수들은 7080 가수들과 달리 아직 충분히 젊고, 여전한 현역들이다.

그 과정이 과거를 불러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길이 될지 아니면 단순히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한국 사회 전체가 퇴행의 길을 걷고 있는 때에, 지상파 방송이 모든 것을 영업 이익으로 치환해야 할 만큼 상황이 각박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와중에 지상파 방송에서 가장 ‘핫’한 프로그램이 90년대를 불러내고 그게 놀라우리만큼 폭발적인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징후적이다. 어느 TV프로그램이 한 세대의 총체적 기록이 되어 그 세대의 적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하지만 이번에도 끝내 그것이 적절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 <무한도전>의 성취가 처음으로 불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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