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을 둘러싼 일련의 논란은 전문성의 중립지대를 만들어낼 수 없게 되어버린 영화비평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여전히 영화비평가이기도 한 허지웅의 발언을 한 종편TV가 인용하면서 영화에 대한 '좌파평론가'의 견해라고 소개한 것이 바로 그 증거일 것이다. 전문가 담론의 생산지로서 영화비평은 자신의 영토를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남은 것은 각자 자신들이 설정한 허수아비 이념들을 상대로 주먹질을 날리는 슬랩스틱 코미디 뿐인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비평가로서 <국제시장>을 한편의 영화로 봐야할 필요를 느낀다. 영화비평의 영토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 영토의 거주민들은 '포스트맨'의 전갈을 기다리며 어디선가 떠돌고 있을 테니 말이다. 각다귀들의 소용돌이에 갇혀버릴지라도, 때로 쓸쓸히 사라져가는 종족의 뒷모습을 추모하는 것도 잠시나마 장렬한 느낌을 선사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여하튼, 그래서 나는 <국제시장>을 한편의 영화로 보고자 한다.

거짓문제이긴 하지만, 지금 쟁점은 이 영화를 둘러싼 진보-보수, 또는 좌파-우파 편가르기에 따라 등장한 영화의 이데올로기 문제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이 문제는 <국제시장>을 어떤 정치적 입장에 유리한 영화인지 가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불려나온 영화가 바로 <변호인>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변호인>을 본 이른바 '민주화세대'가 <국제시장>을 디스한다는 볼멘 소리가 보수의 이름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다.

그러나 반드시 이렇게 편을 갈라서 <변호인>은 '민주화세대', <국제시장>은 '산업화세대'에게 각각 공감을 주는 영화라고 단정하는 것은 과한 느낌이다. 실제로 영화판을 '좌파소굴'로 규정하고 '좌파적출' 같은 무서운 말을 남발했던 이들은 이명박 정부 시절의 보수들이었고, 그 이전까지 영화를 정치적인 스펙트럼에 맞춰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과거 우리에게 영화는 반공이데올로기 같은 국가권력의 이념을 확산시키는 메가폰이거나, 아니면 시대와 동떨어진 탈정치성의 대명사였다.

그러니까 영화판이 '좌파소굴'이었는데, 이제 상황이 역전되어서 <국제시장> 같은 우파에게 호의적인 영화가 나왔다는 식으로 진단하는 것은 너무 손쉬운 결론이다. 왜냐하면 <국제시장>의 반대편으로 호출되고 있는 <변호인> 역시 지금 한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종의 공통 토대 위에서 나온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토대가 무엇인지 지금 우리들 사이에서 합의된 이름은 없다. 다만 두 영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윤곽은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국제시장>은 <변호인>과 대립한다기보다, 다른 시선으로 '같은 세계'를 보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설명하자면, <변호인>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국밥집 순애와 <국제시장>의 주인공 꽃분이네 덕수는 같은 계급에 속하는 동시대인이다. 송변호사가 아니라, 국밥집 순애의 시선으로 <변호인>을 다시 찍는다면 아마 <국제시장>과 비슷한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변호인>에 호의적인 이들은 <국제시장>이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다루지 않아서 리얼리티가 부족하다고 불만인 것 같다. 감독은 물리적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지만, 두 영화 모두에서 역사라는 것은 개인의 인생사를 위한 배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말하자면, 역사적 사실은 '선택'의 문제이지, 절대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두 영화가 개인과 역사의 관계 문제를 파고들기보다, '개인의 부채의식'에 더 강조점을 두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변호인>이든 <국제시장>이든 그냥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무대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언제나 이미 그 '탁월한 개인'은 있었던 것이다. 역으로 그 개인이 없었다면 굳이 그 역사적 사실은 호명될 필요가 없는 셈이다.

순애나 덕수에게 역사적 사건은 '재난'이다. 그것이 국가권력이든, 중공군이든, 베트콩이든, 개인은 재난의 한가운데를 뚫고 살아남아야하는 '생명'으로 묘사된다. '재난'은 개인을 소멸시킨다. '재난'의 추적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개인의 생존을 도모하는 '모험담'이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제시장>은 감독의 전작인 <해운대>의 주제의식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난'에서 살아남은 '생명'은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 규범적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지점에서 덕수는 송변호사와 순애를 합쳐놓은 인물로 판명난다. 덕수는 순애의 처지에 더 가깝지만, 송변호사의 규범을 실천한다. <국제시장>이 잘 보여주듯, 이 규범은 근대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흥남철수에서 미군 사령관이 군함에 피난민을 태우도록 명령할 수 있었던 것은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이라는 근대 문명인의 부채의식 때문이다. '백인의 짐'은 야만을 계몽하고, 문화를 발전시킬 의무인데, 우리의 상황으로 옮겨놓으면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근대화의 논리로 변주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세대' 송변호사가 순애의 아들을 변호하기로 마음 먹는 것도 이런 부채의식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그럼 '산업화세대'인 덕수는 어떤가. 송변호사에게 '백인의 짐'을 지운 것이 법이라는 정의의 이름이라면, 덕수의 부채의식은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 주어진 것일 테다. 덕수는 아버지의 이름을 내면화한 존재이다. 그는 파독광부이자 꽃분이네를 운영하는 자영업자이자 베트남에 군수물자를 조달하러 간 국제비즈니스맨이지만, '노동자'라는 계급적 신분은 드러나지 않는다. 사회적 존재로서 덕수는 <국제시장>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역사라는 '재난'에서 살아남은 '생명'으로 그려질 뿐이다.

<국제시장>은 <변호인>에서 '민주화'라는 정치적인 문제의식을 빼버린 영화이다. 이것은 비정치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개인의 '생명'을 정치에 대립시킨다는 점에서 다른 정치의 문제를 드러낸다. 재미있는 것은 흥남철수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 영화는 북한인민군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중공군과 베트콩이라는 '동포애'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외국인에게 적대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역설적으로 나이든 덕수는 이주노동자에게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고 막말을 하는 고등학생과 싸우다가 자신의 베트남전 체험을 떠올린다. 베트남에서 덕수는 '백인의 짐'을 실천하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지 않는가. 파독광부와 파독간호사로 만나 이룬 덕수의 가정과 이산가족 상봉에서 만난 동생의 미국 남편은 민족주의적인 '동포애'와 다문화주의를 훌륭하게 결합시킨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렇다. 이 관용의 세계야말로 이번에 통진당 해산을 60%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다수결'이라는 원칙에 따라 단행한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이상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의견이 분분할 수 있겠다. 이것은 90년대 한국에서 목격했던 자유주의 르네상스 이후 진보의 독점물이었던 자유주의적인 관용의 개념이 보수의 '탁월함'(virtue)으로 자리매김되어 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보수의 목표가 달성되어 간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항상 비난 받아왔듯이, 이제 보수의 기만술이 자유주의적 관용의 미덕마저 참칭하게 된 것일까. 그러나 확실한 것은 미국의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이 지적하듯이, 관용이야말로 관용의 주체와 불관용의 대상을 구분하는 정치에 대해 침묵하는 대표적인 탈정치화 담론이다 .영화를 보던 중에 관람석을 가득 메운 나이 든 관객들은 이산가족상봉 장면에서 연신 눈물을 훔쳤다. 이 눈물은 진보나 보수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오히려 휴머니즘으로 포장된 비정치의 정치라는 정황이 이렇게 환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여하튼, 지금까지 <국제시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소란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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