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문제’엔 여러 결이 섞여 있다. 문제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으로만 딱 잘라놓고 본다면 ‘부당!’이라고 쓰고 그칠 수도 있겠으나,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그들을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진보주의자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면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수 있다.

‘통합진보당 문제’만 나오면 아수라장이 펼쳐지는 이유는, 보수세력이 의도적으로 두 문제를 포개놓고 ‘야바위성’ 질문을 펼치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수용하지 않으면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를 하려는 음모라는 해석 따위가 그렇다.
▲ 23일자 동아일보 6면 기사
가령 23일자 <조선일보> 사설 <野 또 '통진당과 연대' 헛된 꿈 꾸며 憲裁에 삿대질인가>를 보자. 그들은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대위원장, 우윤근 원내대표, 인재근 비대위원, 정동영 고문, 문재인‧이해찬 의원이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해 언급하거나 원탁회의에 참여한 것을 싸잡아서 ‘헌재 흔들기’로 규정하더니 다음과 같은 결말로 나아간다.
“야당이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통진당 지지 세력의 도움을 기대하고 말고는 스스로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지난 주말 두 여론조사에서 '통진당 해산' 찬성 의견이 60%를 넘었다. 국민의 다수가 종북 세력과 다시는 연대하지 말라는데도 야당이 이를 무시하고 다시 장외의 '사이비 훈수꾼'들에게 휘둘린다면 그것을 누가 말리겠는가. 분명한 것은 그럴수록 야당의 재집권 꿈이 더 멀어질 뿐이라는 점이다.”
이는 통합진보당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규탄하는 분명히 존재하는 길을 애써 지워버린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런 상황에서 통합진보당 구성원들과 굳이 야권연대를 할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럴 수 있는 것처럼 기술했다.
▲ 23일자 중앙일보 6면 기사
같은 날 <중앙일보>는 ‘통합진보당 해산 후폭풍’을 다룬 지면 편집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이러한 ‘전선’의 구축을 시도한다. 6면 기사의 제목은 <“통진당 부활” 주장한 재야 원탁회의>였고, 8면 기사의 제목은 <헌재 결정 가지고 또 진영 싸움… 이럴 때 통진당 탄생했다>다. 6면 기사의 경우 재야 원탁회의에서 나온 발언 중 일부에 주목하여 이 단체가 통합진보당의 정치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8면 기사는 여기서 더 나아가 헌재 결정에 대한 새정치민주연합의 비판적 언급조차 이 ‘전선’에 복무하는 것으로 치부한다. <조선일보>에서 보인 예의 그 시선이다.
<중앙일보> 8면 기사의 일부를 보면 “새정치연합의 분위기는 더욱 미묘했다. 통진당은 지난 19대 총선 당시 새정치연합의 ‘야권 연대’ 파트너였다. 문건 파동으로 유리해진 국면이 일거에 뒤바뀐 데 대한 아쉬움과 개탄이 뒤섞였다. ‘헌재 결정을 무겁게 받아들이긴 하지만 민주주의의 기초인 정당 자유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 (헌재 결정으로) 비선실세 국정농단이 덮어질 거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는 문희상 비대위원장의 발언이 대표적이다”라고 분석했다. 문희상 비대위원장 발언은 ‘정당 자유’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나온 의례적인 것에 가까웠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들이 과거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 파트너였기 때문에 주저한 것처럼 묘사했다.
<동아일보> 역시 5면에 실린 <통진당 손잡았던 새정치聯의 공허한 헌재 비판>란 제목의 민동용 기자의 기자수첩에서 비슷한 시선을 드러냈다. 민동용 기자는 “제1야당인 새정치연합은 검찰 수사, 법원 판결, 헌재 결정을 입맛대로 재단해 불리한 결과에는 ‘정치적으로 의도가 있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래서야 수권정당으로 거듭나기 어렵다. 새정치연합은 헌재의 이번 통진당 해산 결정을 계기로 확실하게 종북과 선을 그어야 한다. 2012년 총선 승리에만 집착해 통진당의 손을 잡고 ‘야권연대’를 한 원죄를 씻어내야 한다. 공학적인 수(數)의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가치, 비전에 승부를 걸어야 할 때다. 자기 성찰 없이 남 탓하는 정치는 구태다”라고 주문했다. 헌재 판결문에 대한 논란에 대해선 굳이 논의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 23일자 조선일보 5면 기사
보수언론은 현상적으로는 재야 원탁회의와 새정치민주연합의 대응 및 반응에 ‘우려’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되짚어봐도 그들은 야권 전체에게 다른 선택지를 주지 않고 “헌재 판결에 환호하거나, 아니면 통진당 ‘종북’세력‘과 함께 싸워라”며 ’전선‘을 긋고 있는 것일 게다. 그러한 싸움이 벌어진다면 보수언론에겐 화려한 ’꽃놀이패‘, 야권의 입장에선 자기 세간을 태워가며 치르는 ’불꽃놀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보수세력과 보수언론의 이러한 ‘야바위’ 놀이 앞에서 이른바 진보진영이 언제나 ‘지는 패’만 뽑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앞서 말했듯 통합진보당을 정치적으로 옹호하는 것과 그들의 해산에 반대하는 것 사이에는 제법 큰 거리가 있다. 그러나 공안당국 및 보수언론 뿐 아니라 통합진보당 측조차 양자를 같은 것으로 포개고, “우리를 지지하지 않는 이들은 공안당국을 편드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실정이다.
“진보정치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이정희의 큰 절 앞에서 “통진당의 부활” 운운한 재야 원로들은 통합진보당 사람들에게 “녹취록의 내용 일부라도 인정하고 그것을 유권자에게 사과해야 한다”, “통합진보당은 이석기 의원의 생각과 다르다고 공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정원의 작업이라고 발언을 전면 부인하는 것도 거짓말이다” 등과 같은 충고를 한 적은 있는지 모르겠다. 화석화된 진영논리 속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보수세력일 뿐이요, 패배하는 것은 한국 사회일 뿐이다. 언젠가부터 진보세력도 다만 자신들의 ‘멋있음’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그 패배를 방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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