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종북과 손 끊은 진보’를 요구하는 제언이 나온다. 물론 진보에도 혁신이 필요하겠고, 특히 북한에 대한 태도가 의심스러운 이들과의 관계설정을 확실하게 하지 못한 오류는 진보정당 운동은 물론 야권에 끼친 해악이 있다고 하겠다. 그렇기에 진보진영에 대한 제언에는 의미있는 부분이 있다.

가령 22일자 <동아일보> 5면에 실린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 ,박용진 전 새정치민주연합 홍보위원장, 최창렬 용인대 교수, 최규엽 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김형준 명지대 교수의 발언에도 경청할 구석은 있을 것이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최규엽이 이 문제에 관해 발언하는 것을 두고 지나치게 뻔뻔하다고 평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사설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충고의 의도를 살피면, ‘종북과 손 끊은 진보’에 대한 요구가 과연 실체가 있는 요구인지를 의심하게 된다. 22일자 <동아일보>는 <야권은 국민 눈높이에 맞춰 종북 세력과 단절하라>란 제목의 사설에서 “이들은 내년 4월 보궐선거 때도 간판을 새로 붙인 정당 소속으로든, 무소속으로든 다시 국회 입성을 노릴 것이 뻔하다. 야권의 후보 단일화나 정당 간 연대가 또 일어날 수도 있다.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대로 실질적인 종북 세력 청산을 해내려면 제1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을 비롯한 군소 야당들이 통진당 잔존 세력과 절연(絶緣)한다는 단호한 태도가 필요하다”라고 주문했다.
또 <동아일보> 사설은 주대환 사회민주주의 대표의 발언을 소개하며 “정작 통진당의 숙주(宿主) 노릇을 했던 새정치연합에선 이런 자성조차 듣기 힘들다”라며 비판했다. 진보정당 뿐 아니라 야권연대를 했던 새정치민주연합의 반성 역시 촉구한 것이다.
▲ 22일자 동아일보 5면 기사
보수언론의 입장에서야 ‘통합진보당과 연대한 책임’을 되도록 야권 전체로 넓히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의 입장에서 보면 이와 같은 비판은 억울한 부분이 있다. 일단 <동아일보> 사설이 비판한 이해찬 의원의 “우리 헌법 체계가 헌재에 의해 무너진다는 것이 가슴 아프고 슬픈 일”란 발언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 것이지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표시한 것이 아니다.
물론 2012년 총선 야권연대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이 도의적인 유감 표명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으로선 통합진보당 구성원들의 미심쩍은 정치적 입장을 알기가 어려웠다. 이 부분에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은 현 통합진보당 세력과 함께 당을 구성했던 유시민 등 참여계와 노회찬‧심상정‧조승수 등 진보신당 탈당파일 것이다.
특히 통합진보당 세력과 한 번 정치적으로 결별했다가 다시 당을 만든 진보신당 탈당파들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다. 그들 역시 통합진보당 세력 때문에 또 한 번 피해를 입게 되었고, 그렇기에 현재 정치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을지라도, 적어도 도의적인 차원에선 그러하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어쩌면 사과를 해야 할 입장이 아니라 사과를 받아야 할 입장이다.
두 번째로 통합진보당이란 정당을 해산한 것은 통합진보당 세력과 ‘연대’를 막기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오히려 통합진보당이 존속해야 새정치민주연합이나 정의당이 그들과는 야권연대를 하지 않는 식으로 연대 가능한 세력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별할 수 있다.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 구성원들이 어디로 흩어질지 알기 어렵고 기존 진보정당들은 새로 입당하는 이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된다. 통합진보당의 정당 활동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야권연대에 포섭되는 것이 더 문제라고 봤다면 정당 해산의 논리의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
▲ 법재판소가 정당해산 결정을 내린 통합진보당 소속 비례대표 지방의원 6명에 대해 의원직 상실을 결정한 22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 5·18 민주광장에서 통합진보당 소속 기초의원이 헌법재판소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이날 선관위는 통진당 소속으로 선출된 지역구 기초의원 31명에 대해서는 법무부의 청구가 없어 헌재가 따로 판단을 내리지 않은 데다 공직선거법과 정당법에도 관련 규정이 없어 판단할 사항이 아니라는 입장을 내놨다. (연합뉴스)
셋째로는 ‘종북’이란 말이 모호성을 넘어 지나치게 단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종북’이란 말은 2006년에서 2008년 사이 민주노동당 분당 정국에서 당내 평등파들에 의해 기존 극우세력이 쓰던 ‘친북’보다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시선을 드러내기 위해 개발된 단어다. 그렇기에 ‘종북’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수구세력에 투항한 것으로 보는 시선에도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의 헌재 판결문은 통합진보당의 핵심세력을 ‘북한 사회주의를 추종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폭력으로 전복하려는 이들’로 사실상 규정지었다. 이는 진보진영 내에선 통합진보당의 정치적 입장을 가장 강도 높게 비판하는 이들도 확신을 가지고 할 수는 없던 비판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0%라고 확언할 수도 없겠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심증의 차원에 있는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진보세력이 북한 체제에 지나치게 우호적이거나 온정적인 경향을 보이는 이들과 일정한 선을 긋는 일은 필요하겠지만, ‘종북’을 헌재와 같은 방식으로 정의하고 그들을 ‘종북’이라 부르며 손을 끊으라고 요구한다면 인정의 영역이 아니라 원칙의 영역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종북’과 손을 끊어야 하는 것이 진보이기만 한 지도 물어야 할 바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한겨레> 22일자에 실은 <헌법재판소가 지키려는 것>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이는 국내 정치의 구도인 ‘보수-진보’ 프레임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보수 세력이, 국정원에서 개발한 ‘대세(대한민국 세력)-반대세(반대한민국 세력)’라는 프레임을 통해 국내정치 차원의 대결을 내부와 외부 사이의 대결로 바꿔놓으려 한 것과도 궤를 같이한다”라며 헌재의 정치적 의도를 분석했다.
▲ 22일자 한겨레 31면 칼럼
이는 굳이 헌재 판결이 아니라 보수언론의 오랜 보도의 관성이 보여준 바이기도 하다. ‘종북과 손 끊은 진보’가 그간 없었던 것이 아니다. 보수언론이 그들을 무신경하게 대했거나 거추장스러워 했던 것이다. 이번 헌재 판결문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을 하려면 강령에 ‘진보적 민주주의’와 같은 말랑말랑한 단어가 아니라 ‘사회주의’와 같은 말을 넣어야 할 것 같다.
보수언론이 평소에도 이와 같은 시도를 용납했을까? 물론 그럴 리 없다. 보수에게 ‘종북’은 ‘진보’를 박멸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위협이 될 뿐, 평소에 그들이 수호해야 하는 것은 급진적 좌파가 침해할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소에는 그들에게 ‘종북’으로 낙인찍힌 저 세력이 온건한 구호를 내세워 보수언론의 견제를 덜 받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에서든, 민주노동당에서든 말이다. 이는 그들의 의도는 아니고 경향성이었을 수도 있겠으나,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진보정당 운동에 있어 평화통일을 말하면서 북한의 입장에 온정적인 이들이 딜레마란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이 보수언론에는 ‘꽃놀이패’이며, ‘진보’를 견제하기 위한 유효적절한 수단이란 것도 분명하다. 결국 통합진보당 해산이란 것도 그들이 ‘종북’이라 부르는 이들을 ‘진보’에 확실히 얽어매려고 기획된 일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층은 결집하고, 해산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들은 통합진보당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지 않더라도 모여야 하는 이 상황을 보라. 그들은 ‘종북과 손 끊은 진보’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진보’를 견제하기 위해, ‘종북’을 호명해야 할 뿐이다. 보수언론이 그 지점을 모른 척하는 이상, 그들이 진보진영에게 건네는 고언은 반쪽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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