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해산은 언론 논조에 따른 지면 편집의 내용을 드라마틱하게 가르고 있다. 보수언론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옹호하면서 진보세력이 거듭나야 한다는 주문을 제기하고 있고 진보언론은 보수화된 헌법재판소가 정권의 정치적 이해에 치우친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 중앙일보 22일자 1면 기사.

<중앙일보>는 22일 1면에 <통진당 해산, 찬성 64% 반대 24%>라는 제목으로‘긴급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중앙일보>는 헌법재판소 결정 내용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국민들의 지지 여론이 과반을 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앙일보>는 5면 <통진당 해산, 모든 연령대서 찬성이 많았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여론조사 내용을 더 상세히 전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자들이 통합진보당 소속 지역구 의원직 상실 결정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것을 제외하면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다수의 국민들이 상당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중앙일보>는 6면에서 347쪽에 이르는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분석하며 세부 내용을 전했다.

이날 <조선일보>는 헌법재판소 결정의 내용과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거의 ‘총력전’을 방불케하는 지면 편집을 선보였다. <조선일보>가 이날 1면에 배치한 기사는 ‘팔면봉’과 사진기사까지 합쳐서 7개인데 톱기사는 진보세력이 통합진보당과 헌법재판소에 대한 양비론으로 사실상 통합진보당에 면죄부를 줘서는 안 된다는 기사다. 나머지는 박근혜 대통령의 통합진보당 관련 발언 기사, 통합진보당 계좌에 잔고가 거의 없어 빼돌렸는지 의심스럽다는 기사, 미국이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검토한다는 기사 등이다. 영화 국제시장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제외하면 모두 ‘의미심장한’ 맥락이 있어 보이는 1면 편집이다. 심지어 사진기사도 탈북 어린이들의 성탄맞이 소식이다.

<조선일보>는 3면, 4면, 5면, 6면 일부까지 걸쳐 진보세력에 문제를 제기하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해설하는데 집중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4면에 헌법재판소 결정 근거를 뒷받침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된 <민주주의가 죽은 게 아니라…통진당 주사파 세력이 진보를 죽였다>는 기사를 배치했고 5면에는 <통진당, 이석기 1·2심때 “RO모임은 당 행사”…결국 제 발등 찍어>란 제목의 기사를 배치했다. 통합진보당의 주요 구성원들이 과거 민혁당 사건 등에 연루된 ‘주체사상파’에 속하는 게 명확한데다 이석기 전 의원 사건에 대한 재판에서는 RO와 당 행사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정당해산심판에서는 RO와 당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모순된 행보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 조선일보 22일자 3면.

이날 <조선일보> 3면 편집은 통합진보당 해산과 제1야당 및 남은 진보세력을 연관시키기 위한 의도가 적자라하게 드러났다. <조선일보>는 <통진당과 야권연대 부르짖던 인사들, 침묵으로 일관>이란 제목의 기사를 이 면에 배치하고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한명숙, 이해찬, 정세균, 박지원 의원 및 정의당 심상정 의원 등의 야권연대에 대한 발언을 문제 삼으며 통합진보당이 원내에 진출하는데 이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의 아래에 <통진당 함께 창당해놓고… 심상정·노회찬·유시민, 자성 모습 안보여>라는 제목의 기사 역시 배치했다. 통합진보당 창당 주역인 이들이 당시에는 온갖 긍정적인 언급을 해놓고는 이제와서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통진당 창당으로 종북 세력과 손잡은 과오에 대해선 아직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진보세력의 자성을 요구한 것은 <동아일보>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일보>는 이날 지면 편집에서 통합진보당 해산보다는 핵발전소 도면 유출 사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5면 <“종북과 완전 결별…일자리-복지 민생진보로 거듭나야”>라는 제목의 기사를 배치해 진보정치가 거듭나야 한다는 문제제기를 했다. <동아일보>이 기사에 인용된 이들은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 최규엽 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김형준 명지대 교수, 박용진 전 새정치민주연합 홍보위원장 등이다. 교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과거 민주노동당에 몸을 담았던 이들이며 특히 최규엽 전 최고위원의 경우는 당시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 등과 함께 ‘자주파’로 분류됐던 인물인데, 낡은 이념적 프레임이 아닌 노동, 복지, 환경 등 진보진영 고유의 가치에 집중하라는게 이들의 조언이다.

▲ 동아일보 22일자 5면.

그러나 이날 <동아일보>의 사설을 보면 이들이 진보세력이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을 어떤 맥락에서 내놓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이날 <야권은 국민 눈높이에 맞춰 종북 세력과 단절하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위의 <조선일보> 기사와 거의 같은 맥락의 주장을 내놨다. 제1야당 등의 야권연대로 통합진보당이 성장할 수 있었음에도 자성의 목소리를 듣기 힘드니 반성을 해야 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결국 ‘종북과의 단절’을 진보정치 혁신의 조건으로 제시하며 일종의 ‘공범’으로 몰아버린 셈이다.

▲ 경향신문과 한겨레 22일자 1면.

보수언론이 이 같은 지면 구성을 선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 논조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보수적인 헌법재판소에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의 기사로 1면을 구성했다. <경향신문>은 1면 톱에 <헌법·민주주의 근간 흔드는 ‘8대 1’ 헌재 체제>라는 제목의 기사를 배치했고 <한겨레> 역시 <헌재 재판관 구성부터 ‘기울어진 저울’>이란 제목의 기사로 헌법재판소 결정의 정치적 편향성 논란을 다뤘다. <경향신문>은 3면에서 헌법재판소를 판검사 출신의 법조 엘리트들이 장악해 사회적 다양성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4면에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청와대와 여당이 그간 제기된 비선 논란을 덮고 지지층을 결집시키며 여당은 국면전환을 위한 총공세에 나서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경향신문>은 4면에서 정권의 중간평가적 성격이 있는데다 진보정당의 200만 표심의 향방을 예측할 수 없는 4월 재보선이 상당히 중요해졌다는 평가 역시 내놨다.

<한겨레>는 <경향신문>에 비해 박근혜 정권의 반공적 성향을 더 강조하는 내용의 지면 편집을 선보였다. <한겨레>는 3면 <‘아버지 시대’로…박대통령의 시계는 거꾸로 돈다>는 제목의 기사를 비롯해 8면에 <법치주의 이름으로 헌법을 매장한 헌재>라는 제목의 김종철 연세대 법한전문대학 교수 기고문을, 9면·10면에 <민주화로 태어난 헌재, 기득권 수호 첨병으로>, <대한민국 제헌헌법이 바로 진보적 민주주의 헌법>란 제목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기고문을 크게 실었다.

▲ 경향신문과 한겨레 22일자 사설.

두 신문은 사설에서도 평소의 두 배 길이에 달하는 사설을 함께 배치했는데 형식에 있어서는 비슷한 모양의 편집이었지만 세부 내용에서는 약간의 톤 차이가 있었다. <한겨레>는 2012년 대통령 선거 후보 토론회에서 이정희 당시 통합진보당 후보가 공격적 태도로 토론에 임했던 장면을 상기시키며 ‘정치보복’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박근혜 대통령이 ‘민주주의 후퇴의 이정표를 세운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통합진보당이 쇠퇴하고 몰락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헌법재판소가 정치의 과정에 직접 개입해 권위가 훼손됐다며 공안정국 조성 등 정권의 의도에 의해 우리 사회의 내부가 분단되는 등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통합진보당 해산’이라는 문제 자체가 정치적 입장에 의해 판단이 갈리는 문제인 것도 분명하지만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의 태도와 편집이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것은 그 자체로 한국사회의 이념적 핵심고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아직도 냉전체제와 그 이후의 모색이었던 87년 체제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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