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 이유는 사회를 지탱하는 굵은 부분이 워낙 보수적인 탓이다. 정부가 가장 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대기업이 더할 것이다. 아쉽게도 대기업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내부에서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대기업의 모습은 그렇다. 지난 몇 달간 우리와 함께 울고 웃었던 드라마 미생에서 역시 그랬다.

인턴에서 살아남아 원인터에 남았지만 다른 동기와 달리 장그래는 2년 계약직이었다. 많은 동료들의 도움과 간청이 있었지만 보수적인 집단인 대기업에 살아남지는 못했다. 업무수행능력이 입증되었지만 결국 장그래의 초라한 스팩을 용납하지 못한 것이었다. 대단히 희망적이었지만 기적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장그래의 정규직 전환은 무위로 돌아갔다. 희망은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니라지만 기적은 확실히 없었다.

그 무거운 소식을 전하러 영업3팀에 온 선차장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 무거운 침묵의 의미를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때 장그래 아니 임시완의 표정은 참 멋졌다. 많은 희망을 걸어야 했던, 아니 걸고 싶었던 끝에 확인된 절망을 정말 잘 표현했다. 이때 임시완의 표정에 20회 동안의 미생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확실히 아이돌로서의 임시완은 아무 매력을 느낄 수 없지만 배우로서의 임시완은 정말 잘한다. 미생을 20회씩이나 촬영한 때문인지 임시완의 눈빛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그렇게 장그래는 원인터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3주 후,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난 후 오차장이 차린 회사에서 장그래와 김대리가 다시 만났다. 오차장과 장그래가 떠난 후 김대리는 원인터를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다. 월급쟁이에게 봉급과 진급이 전부라지만 김대리에게는 사람이 먼저였던 것 같다. 그렇게 다시 모인 영업3팀은 완생 같은 미생의 길을 다시 시작했다.

회사를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직업을 잃는 것만이 아니라 매일 부대끼던 사람들과 그 일상을 잃는 것이다. 떠난 사람에게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시급하기에 사람과 일상의 상실에 낙담할 여유라고는 없지만 남겨진 사람에게는 후자만 있기에 김대리의 합류는 다소 극적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고, 수긍이 가는 결말이었다.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한 것이 희망이라지만 미생은 거자필합의 결말을 가져갔다. 현실도 꼭 그걸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결말부분이니 이 정도의 작위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미생은 회사가 아닌 인생을 다룬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없을 때의 희망은 일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있을 때의 희망은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렇다. 사람에 대해서는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건져지는 것이 있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이다.

20회 그러니까 10주간 우리는 오차장과 김대리, 장그래 그리고 안영이, 장백기, 한석률 등을 통해 미생인 우리와 똑같은 인생을 지켜봤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자신의 일상과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인데 묘하게도 일상과 다를 바 없는 미생에 폭 빠져 지내야 했다. 힘겹고 버거운 일상에 등 돌리는 대신 그것을 향해 똑바로 서서 바라본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였다.

미생에서 느낀 동일성의 감정은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갖지 못했던 것이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 같은, 그래서 때로는 진심으로 울컥하고 환호하기도 했던 드라마였다. 그러나 그런 열광도 결국은 끝나고 만다. 미생은 드라마 속이나 바깥이나 모두 어우러져 인생의 축소판이었다는 것이다. 새로 배울 것도, 다를 것도 없는 평범하게 하루를 사는 모두의 일상이자 인생이 담긴 드라마였다. 언제 또 이런 드라마를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는 것조차 인생을 닮아있다. 미생과 함께한 10주간은 정말 행복했다. 감사한 일이다. 그동안 쓰는 일보다 보는 일에 더 집중해야 했던 미생일기도 이렇게 끝난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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