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청구인(=통합진보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의 목적과 활동은 피청구인의 목적이나 활동과의 관련성이 인정되는 범위에서 판단의 자료로 삼을 수 있으나, 민주노동당의 목적이나 활동 자체가 이 사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소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서 날아간 ‘양심’의 마지막 끝자락을 잡듯 결정문 요약에서 위와 같은 여지를 남겼다. 말하자면 헌법재판소가 판단한 것은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의 ‘진보정당 14년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의 통합진보당’이란 의미일 것이다.
물론 위와 같은 면피는 그들이 검토했다는 수많은 자료와 충돌한다. 그들은 이 정당의 목적이 ‘북한식 사회주의’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민주노동당 시절 당 간부가 쓴 문건까지 증거로 들이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재의 판단과는 별개로, ‘통합진보당 3년’은 그 자체로 파란만장해서 민주노동당의 역사와 따로 떼어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2006년 일심회 간첩 사건으로 자주파와 평등파가 결정적으로 부딪힌 이후 1997년 대선 국민승리21을 전신으로 2000년 창당된 민주노동당은 2008년 분당 수순으로 돌입했다. 자주파들이 민주노동당의 자산을 승계하며 남았고 평등파들은 진보신당을 결성했다. 통합진보당이란 기획이 뜨고 결성된 것은 2011년의 일이었다.
통합진보당이란 기획은 본질적으로 볼 때 참여당 유시민 등의 대중적 인지도, 기존 민주노동당의 조직, 그리고 노회찬·심상정·조승수 등 진보신당 출신의 ‘스타정치인’들의 화학적 결합을 꾀한 것이었다. 유시민 그룹은 2011년 가을 ‘안철수 열풍’이 불어오기 전까지 ‘야권 대선후보 지지율 1위’였다. 민주당 조직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조직을 갖추면 야권 단일 대선후보가 되거나 혹은 그것을 포기하는 대가로 총선에서 독자생존이 가능한 규모의 제3정치세력을 보증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한편 민주노동당의 경우 고루한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는 대중성 있는 세력이 필요했다. 또 진보신당 탈당파들의 경우 진보신당 독자생존 노선으론 현실적으로 의미있는 정치세력을 결성할 수 없다 보았을 것이고 참여계까지 포섭한다면 진성당원제 체제에서 자주파를 상당히 견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선 ‘통합된 단일 진보정당’이란 대의를 위해서 진보신당이 필요했다. 진보신당 잔존파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어쨌든 서로의 절실한 필요에 의해 탄생한 통합진보당은 진보지식인 그룹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통합진보당이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통합당과의 야권연대를 이룩할 때까지만 해도 사정은 좋아 보였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통합진보당의 총선 결과를 7~15석 정도를 예상했지만 통합진보당만큼은 교섭단체 확보를 목표로 삼을 정도였다. 이 시기를 보여주는 <미디어스> 기사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통합진보당의 네 스타 정치인 '이유노심'의 트위터 팔로워를 합치면 100만이 넘는다, 라고 함께 언급되던 시절이 있었다. 2012년 3월 당시 트위터 화면 캡쳐 사진
찜찜한 상황은 야권연대 경선지역으로부터 발생했다. 당시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가 서울 관악을에서 민주당 김희철 후보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일이 생겼다. 처음에 <미디어스>는 다음과 같이 승리요인을 분석했다.
▲ 통합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가 지난 2012년 3월 1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대표단회의에서 유시민, 심상정, 조준호 공동대표와 손을 맞잡고 야권 단일화 확정을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곧 민주당 김희철 후보가 ‘경선 조작 의혹’을 제기하며 반발했다. 인터넷사이트 게시판에 그 증거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올라왔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이정희 대표는 견디지 못하고 사퇴를 하게 됐는데, 그 상황에서 진보언론과 진보지식인의 상황판단은 편향적인 구석이 있었다. 이시기 <미디어스>는 다음과 같은 기사로 이정희 대표와 통합진보당 측에 의혹을 제기했다.
▲ 지난 2012년 3월 23일 국회 정론관에서 서울 관악을 야권 단일후보 사퇴 기자회견을 하다가 울음을 참고 있는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의 모습 (연합뉴스)
어쨌든 총선은 통합진보당에게 13석의 의석을 안겨주며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총선이 마무리되자마자 통합진보당 내에서 비례대표 후보 경선 부정 의혹이 폭로됐다. 갑자기 ‘경기동부’가 인터넷에서 담론적 대세가 되더니 모든 보수언론이 자주파 운동권의 역사를 파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비례대표 경선 부정은 경기동부라는 다수파만이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미디어스>는 당시 이미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내 다수파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사기극’이란 서사를 고수하다가 당내에서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기회를 놓쳤다. 그 사이를 틈타 검찰은 통합진보당 당원 명부를 압수해갔다. 하루하루 상황이 나빠져 갔지만 이석기‧김재연 후보는 의원 등록을 무사히 마쳤다. 당시 나왔던 기사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통합진보당 조준호 공동대표가 2012년 5월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19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경선의 부정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 2012년 5월 22일자, <100분 토론>에서 시민 논객은 이상규 당선인을 향해 '북한 3대 세습, 북한 핵개발 그리고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대답'을 요구했다. 이에 이 당선인은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대답을 유예했다. 당시 방송화면 캡쳐 사진
이후 국회에 입성한 이석기 의원은 기분이 좋았는지 정치부 기자들과 낮술을 마시다 예의 ‘애국가 논란’을 일으켰다. 비례대표 경선부정 의혹에 대한 보고서가 발표되었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고 윤금순 후보가 사퇴하고 비례 14번 서기호 후보가 의원직을 승계하였으나 사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이석기․김재연 의원에 대한 제명안이 불발되자 통합진보당의 비당권파 의원들은 ‘셀프 제명’으로 통합진보당을 빠져나와 진보정의당을 만들었다. 이른바 ‘2차 분당’ 정국이었다. 이 시기 <미디어스> 기사들은 다음과 같다.
▲ 2012년 7월 27일, 통합진보당 원내의원들의 이석기, 김재연 의원 제명안 부결 후 심상정 의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원내대표 사퇴 의사를 전하고 있다.
▲ 통합진보당 혁신파 비례대표 의원들(왼쪽부터 김제남, 정진후, 박원석, 서기호 의원)이 2012년 9월 7일 오후 정론관에서 통합진보당을 떠나겠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후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은 대선정국까지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정의당은 심상정 의원을 대선 후보로 단독 등록했다가 어느 시점에 사퇴했다. 통합진보당은 이정희 대표를 후보토론회까지 끌고 가서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습니다”를 시전하여 야권 지지자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여권 지지자들을 결속시켰다. 이정희 대표는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여줬지만 여권의 세간이 아닌 야권의 세간을 태우는 불꽃놀이였다. 이때의 활약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극심한 반감을 만들었다는 시각도 있다. 이 시기의 <미디어스> 기사들이다.
▲ 2012년 10월 14일, 심상정 진보정의당 의원이 대선후보 출마를 선언한 후 '전태일 다리'에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게 대선은 ‘박근혜 시대’를 개막하는 것으로 마감되었다. 하지만 대선이 끝나자마자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정국이 벌어졌다. 국정원이 선거기간 중 조직적으로 댓글을 달아댔다는 정황이 보도되면서 국정원은 위기에 처했다. 위기에 처한 국정원은 ‘이석기 RO 녹취록’이라는 것을 꺼내들었다. 이른바 ‘이석기 내란음모사건 정국’이다. 이 시기 <미디어스>는 “국정원이 사건을 조작하고 사상의 자유를 침해했다”와 “북한을 추종하는 이석기 등을 엄벌해야 한다”라는 양쪽 프레임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보려고 애썼다.
드디어 사태는 마지막 국면으로 치닫는다. 박근혜 정부 국무회의에서 법무부가 ‘정당 해산심판 청구’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박근혜 정부의 ‘억지스러운’ 공세에 경악을 표하며 사법부의 최소한의 양심에 기대를 걸었지만 그 결말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 2주년인 ‘12.19 멘붕’으로 매듭지어졌다. 오히려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을 다룬 2심 법원은 ‘공안검사 문건’ 수준의 검찰 논리에 일정 부분 선을 그었으나 생각지도 못한 헌법재판소가 ‘통수’를 날렸다. 마지막 시기 <미디어스>의 기사들은 다음과 같다.
▲ 통합진보당 의원단이 2013년 11월 6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통합진보당사수결의대회에서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에 항의하며 삭발식을 하고 있다. 이상규(왼쪽부터), 김미희, 오병윤, 김재연, 김선동 의원. (연합뉴스)
▲ 내란음모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항소심 선고가 2014년 8월 11일 서울고법에서 열리고 있다. 2심에선 1심보다 감형된 징역 9년이 선고되었다.
정리하자면, 통합진보당의 ‘3년의 세월’은 ‘시대와의 불화’를 보여준 기간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시대착오적 불화’였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시대착오적이었는데, 박근혜 정부는 그들을 탄압하기 위해 더욱 시대착오적인 수단을 동원하고야 말았다. ‘5공이 낳은 파행적 유산’을 ‘4공이 낳은 아이들’이 단죄했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그들이 정말로 무엇이었는지 '정체'도 미처 밝히지 못한 채로 말이다.
▲ 박한철 헌재소장이 19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청구 선고에서 해산 결정의 요지가 담긴 주문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그리고 시민사회세력과 진보진영은 이들이 부당한 일을 당했음을 주장하면서도, 이들과 같은 견해를 지닌 것은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아마도 박근혜 정부의 노림수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 난장판은 정부가 아무것도 처리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애초에 박근혜 정부는 크게 하고 싶은 일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정부의 노림수와 상관없이, 시민사회세력과 진보진영은 그들을 ‘민주주의’의 가치로 옹호하되 섣불리 ‘진보’란 이름을 낭비해선 안 될 것이다. 이미 ‘진보’란 이름을 가진 정당은 쓸 수 없게 되었으니 뭔가 다른 단어를 개발해야 할 상황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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