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용감했다. 공안검사 출신 2인 등 보수적 성향의 인물이 많아 시민사회에 우려를 주었던 9인의 헌법재판관들은 8대 1이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스코어로 통합진보당 해산 및 소속 의원 전원 상실을 결정했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낭독한 헌재 판결문은 품위 있는 원칙과 원칙 없는 예단이 결합하여 황당한 결론으로 치닫는 엉망진창 난장판의 모습을 보여줬다. 헌법에 의거한 바 민주주의의 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의미, 정당 해산 심판제도의 취지를 설명할 때엔, 급박하게 결론을 내린 헌재의 속셈과 처지를 뻔히 알면서도 “이 법리에서 어떻게 이 정도 사안에서 정당 해산이 가능할까…”라는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성급한 예단에서 민주주의 체제와 그 수호기관에 대한 자부심과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가 19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청구 선고가 끝난 뒤 변호인과 심판정을 떠나고 있다. 헌재는 이날 선고에서 통합진보당에서 대한 해산과 의원 5인에 대한 의원직 박탈을 결정했다. (연합뉴스)
정당해산 제도를 가진 몇몇 유럽 국가들에 대한 권고 지침인 유럽 평의회 산하 베니스위원회의 지침을 참조하면, 정당해산 제도는 소수정당이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헌법을 변화시킬 것을 선언했다 하더라도 폭력을 실제로 동원했고 실질적 위험이 있을 때에만 실행될 수 있다. 이를 통합진보당에 적용하면 단지 구성원들이 북한 체제를 추종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체제에 실질적 위협이 될 정도의 폭력이 행사됐거나 예고되었어야 한다.
헌재는 통합진보당의 당 강령부터 문제삼았지만,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강령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민주노동당 활동 당시 평등파들은 사회주의적 지향을 강령에 담고 싶어 했지만 이에 부정적이었던 자주파가 타협적으로 제시한 것이 ‘진보적 민주주의’였다. 결국 민주노동당 강령에 담기지 못했던 이 단어는 평등파들이 당을 떠난 이후에 강령에 등장했다. 자주파의 이념을 북한 추종적인 무언가로 의심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진보적 민주주의’는 그 이념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단어가 아니다. 이는 참여계와 진보신당 탈당파가 함께 한 통합진보당 시절에도 그 강령이 통용됐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해산에 찬성한 인용 판결은 “당 강령은 지극히 추상적이므로 내용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라고 하더니 “그 강령을 주장한 주체들에 입각해 그 취지를 살펴야 한다”라고 넘어간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논리의 곡예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강령을 문제 삼으면 모든 진보정당이 해산될 수 있다는 반론을 피하기 위해 강령과 함께 그 강령을 주장한 주체를 봐야 한다고 어물쩍 피해간 것이다. 이것이 근대적 사법기구가 할 수 있는 주장인가.
헌재는 결론과 상관없이 적어도 “당 강령은 문제가 없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물론 그들이 똑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부족한 근거라도 여러 개가 뭉쳐야 그들의 극단적인 평결을 ‘직관적으로나마 자연스럽게’ 보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구성원을 살핀다 해도 문제는 크다. 스페인이 바스크정당을 해산할 때는 그 정당이 테러단체와 연계되어 있다는 의심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리하여 스폐인 정부는 바스크정당과 테러단체의 연계성을 규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통합진보당 문제에 비유하자면 테러단체가 ‘RO’, 바스크정당이 ‘통합진보당’ 쯤 될 것이다.
그런데 ‘RO’는 이석기 내란음모재판에서도 실체를 의심당한 상황이고, 헌재 판결문의 어디에서도 ‘RO’와 ‘통합진보당’의 관계를 입증하는 논리는 보이지 않는다. 개개인을 국가보안법으로 과잉단죄할 수 있는 나라에서 이 정당을 해산해야 할 시급할 원인 따위 눈코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다. ‘폭력’이란 단어가 들어간다고 ‘중앙위원회 폭력사태’까지 언급하는 부분은 차라리 코미디다. 중앙위원회 폭력사태도 문제는 있지만, ‘체제에 대해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폭력’을 찾아내라고 했더니 당원들끼리의 내부 폭력사태를 찾아내는데 여기에 대해 무슨 코멘트를 달아야 할까.
▲ 박한철 헌재소장이 19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청구 선고에서 해산 결정의 요지가 담긴 주문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한심한 논변에 찬성한 이가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 중 8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공안검사 출신이 2인이나 포함된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그네들의 상식’이며 ‘그네들의 법리이해’이며 ‘그네들의 민주주의 이해’라면 그나마 체면치레를 하게 해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한 명의 반대자에게 감사할 일이다.
헌법재판소는 87년 체제 성립 이후 6공화국 헌법에 의거해서 1988년에 설립되었다. 대법원과 별도의 헌법재판소가 있는 것은 원칙에 어긋난 일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변칙적으로 헌재에 권위를 싣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긍정적인 역할과 부정적인 역할을 같이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오늘만큼 중대사안에서 법리의 원칙에서 현격하게 동떨어진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적은 없었다. 그간에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으려고 이곳저곳 눈치를 본다는 비판을 받았을 따름이다. 행정부가 정당을 해산시켰던 이승만 정권이나 5공 시절과는 달리, 헌법재판소의 판단 절차를 만들어놨는데도 행정부의 정당 해산 의사가 관철된 상황은, 후대의 청소년들이 사회과목에서 배워야 할 ‘역사적인 판결’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또 대통령제와 헌법재판소 제도 등이 모두 그 취지를 잃고 자멸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박근혜 정부 2년차 말의 풍경은, 박근혜 정부야 말로 ‘6공화국의 완성, 혹은 파탄’을 보여주고 있다는 직감을 확산시킬 것으로 보인다. 낡은 질서를 오도하여 더 낡은 것을 소환하는 이들 앞에서 새 질서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도 못한 이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당장 정치적으로 지지하지도 않는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할 모든 사람에게 던져진 고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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