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내부의 70m 높이의 굴뚝에서 전날 새벽부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이창근 정책기획실장과 김정욱 사무국장이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날씨가 추워졌다. 여기저기서 걱정들이 많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걱정만은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거리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다. 그나마 거리라도 되면 다행이다. 가장 문제는 공중에 있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씨앤앰 간접고용노동자의 경우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김정욱 사무국장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은 쌍용차 평택공장 내 70미터 높이 굴뚝에 올라가 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견디며 그들이 공중에 머무르는 이유는 ‘공장 안 동료들이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2009년 회사의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됐는데 지난달 대법원은 2심 판결을 뒤집고 이들에 대한 회사 측의 정리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이로써 해고노동자들이 법에 의해 구제될 길은 없어져버렸다.

굴뚝 위로 올라간 이들은 지난 15일 공장 안 노동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굴뚝에 올라온 저희들도 쌍용차가 부활의 날개 짓을 힘차게 펄럭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회사 쌍용자동차가 다시 날아오르길 염원하고 있다. 장롱 안에 넣어둔 쌍용의 작업복을 꺼내 입고, 동료들과 환한 웃음을 지으며 티볼리를 만들고, 일이 끝나면 동료들과 소주 한잔 기울이고 싶다”고 호소했다.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쌍용차에서 내년 신차가 나옵니다. 티볼리란 찹니다. 공장 안 동료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죠. 성공적으로 출시했으면 좋겠습니다. 티볼리 광고 모델로 어떤 분이 좋을까요?”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고공농성에 돌입해있는 이 해고노동자들은 애써 명랑한 분위기를 유도하고 있지만 진보적 노동운동을 지지해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달갑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과거 같으면 굴뚝에 올라간 사람들이 평택시민에게 호소하고, 정치권에 호소하고, 양심적 지식인들에 호소하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호소했을텐데 이제 그 모든 것들은 다 소용이 없는 일이고 오직 회사의 성장을 기원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의 매출이 개선되면 복직을 고려해보겠다는 것도 전부 믿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건 어찌됐건 가슴이 아픈 일이다.

사실상 진보적 노동운동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씨앤앰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비정규직지부 소속의 강성덕, 임정균 씨는 지난 11월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인근 전광판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노동자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는 ‘간접고용’ 문제의 직접적 피해자인데다 농성장이 서울시 한복판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이 작용해 진보적 사회운동 단체들의 연대투쟁이 빈번한 상태다. 지난 16일에는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이 이들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결의하며 삭발을 하기도 했다.

▲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가운데), 최문호 희망연대노조 공동위원장(왼쪽)을 비롯한 씨앤앰 사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16일 오후 서울 태평로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삭발식을 마친 뒤 투쟁 머리띠를 매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민주노총 위원장의 삭발투쟁에도 불구하고 씨앤앰 문제는 해결의 열쇠를 찾지 못하고 있다. 시민사회와 제1야당의 중재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체적인 사태 해결 가능성을 장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과거 진보적 노동운동의 위력이 강력할 때에는 민주노총 소속의 다른 노동조합 등이 결합하는 전면적 투쟁도 그려볼 수 있을만한 조건임에도 이들은 사실상 단편적 대응 이외의 뾰족한 수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도 지난 14일에는 복직을 요구하며 경기도 과천시 코오롱 본사 앞 천막에서 40일 넘게 단식농성을 하던 최일배 코오롱 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장이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옮겨지는 사태가 있었다. 회사의 해고와 폐업에 맞서고 있는 스타케미컬 해고노동자 차광호 씨의 굴뚝 고공농성은 200일을 넘겼다. 이들은 하나같이 극한의 상황에 내몰려있지만 진보적 노동운동은 일회적으로 이뤄지는 지지 표명 집회 등 단편적 대응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태의 배경에는 진보적 노동운동 자체가 몰락한 상태라는 현실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첫 직선제가 진행 중이지만 이를 통해 민주노총이 새로운 투쟁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있는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진보적 노동운동에 대한 패배주의와 냉소주의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현장의 노동자들도 더 이상 기대를 품지 않는 비극이 이어져오고 있다.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진보적 노동운동은 지금 고사 직전이다.

이들의 비참한 신세는 진보정치의 무기력함과 짝을 맞추고 있다. 진보적 노동운동과 진보정치는 서로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동반 침몰하는 중이다. 최근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및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등은 새로운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제안한 바 있다. 이 구상에 참여하는 인사들이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정동영 고문과 천정배 고문의 영입을 시사했기 때문에 이러한 계획이 성사될 경우 야권 전체에 상당한 정계개편 압력이 가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지만 핵심 키워드처럼 언급되는 정동영, 천정배 고문의 태도는 새정치민주연합의 한계를 공통적으로 말하면서도 애매모호하다. 정동영 고문의 경우 라디오 프로그램 등에 출연한 자리에서 신당 창당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너무 나간 얘기”라고 답했고 천정배 고문은 “정치권 밖 인사들이 신당창당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발언한 바 있다. 자기가 주도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보겠다는 얘기는 전혀 아닌 셈이다.

제1야당을 포함해 야권에 소속된 정당들 간의 합종연횡은 늘 회자되는 고전적 아이템이다. 지금처럼 진보정당들이 분열돼있는 상황에서 이들간의 통합이나 재편은 당연히 필요한 일일 수 있다. 이를 통해 죽어가는 진보적 노동운동의 동력을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구상 역시 일리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는 위의 예에서 보듯 일부 명망가들의 ‘결단’이 아니면 그조차도 제대로 해낼 수 없는 지경에 진보정치가 내몰려 있다는 점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중 누구도 그러한 재편작업이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될 거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야권에서 언급되는 정계개편 구상에 현실성이 없다는 평가가 계속 나오는 것은 이러한 이유가 크게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뭘 새로 만들고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보다는 실제적인 행동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행동이라는 것에는 남이 시키는 일을 무조건 반복하는 게 아니라 고공농성을 벌이며 거리에서 떨고있는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고 이를 절대다수의 시민들이 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각 세력의 ‘정치적 기획’이 수반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의 시리자나 스페인의 포데모스도 절망적 정치환경을 이러한 기획으로 돌파해 진보정당 간의 재편을 추진할 수 있는 주도적 위상을 얻었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지난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오랜 부진을 딛고 반(反)자민-비(非)민주 세력의 표를 상당 부분 잠식한 일본 공산당도 아베 신조 정권에 반대해 거리로 나온 시민들의 선두에 서는 일관된 정치적 기획으로 성과를 내 향후 야권재편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전히 노동운동의 동력이 문제라는 순환논법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지만 공세적으로 기획을 제출하는 중요한 역할은 진보정당들이 맡을 수밖에 없다. 진보적 노동운동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 위한 야권의 정계개편은 그러한 공동행보의 와중에 모색이 가능한 것이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합종연횡의 정치구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 굴뚝을, 전광판 위를 내버려 둘 것인가? 더 이상의 관성적인 행보로는 공멸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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