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도 이런 전복이 없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아니 뮤지컬이라면 당연히 이런 요소는 기본이겠거니 하는 뮤지컬의 공식을 뒤집었다. 우리나라 뮤지컬 팬은 응당 화려한 무대 세트 혹은 회전 무대에 익숙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원스>는 뮤지컬 팬이라면 당연히 기대할 화려한 무대 세트나 회전 무대 하나 없이 한 무대 세트로 우직하게 승부한다. 배짱도 이런 돌직구 배짱이 없다.

뮤지컬 <원스>의 돌직구 배짱 하나 더. 뮤지컬에 반드시 있어야 마땅할 오케스트라가 통째로 실종했다. 그렇다고 MR로 처리하는 무개념으로 승부하는 건 아니다. 모름지기 배우란 수고한 만큼 개런티를 받지 않는 이상 다른 뮤지컬에 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게 현실적으로 영리한 선택일 터, 하지만 <원스>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곰탱이도 이런 ‘미련 곰탱이’가 없다. 고생을 사서 한다.

기존 오케스트라가 담당했던 음악을 배우들이 모두 직접 소화하기에 이른다. 주인공 남자배우는 기타와 사투를 벌이고, 여배우는 피아노와 징그럽게 붙어있어야만 공연이 가능한 뮤지컬이 <원스>다. 참고로 프레스콜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윤도현이 칭찬한 임진웅은 연기하기에도 바쁜데 반조, 기타, 만돌린, 드럼, 캐논의 5가지 악기를 다룬다.

▲ 뮤지컬 ‘원스’ ⓒ신시컴퍼니
무대가 하나라고 해서 감동이 반감될까. <원스>의 음향 효과 채널은 기존 뮤지컬에 사용되는 음향 효과 채널의 배가 넘는다. 웅장한 사운드에 익숙한 관객이 듣노라면 사뭇 심심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큰 사운드가 아니면서도 담백한 음악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것처럼 관객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MSG가 아닌 천연향신료만으로 조리한 음식의 풍미라고 하면 비유가 적절할 듯하다.

여자는 남자의 구원자라고, 사랑하는 여자가 떠나가고 음악을 할 의욕이 바닥에 나뒹구는 ‘가이’에게 삶의 의욕이라는 마중물을 건네주는 이는 어눌한 말투의 체코 이민자 ‘걸’이다. 가이에게 걸이라는 구원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가이는 될 대로 되라는 삶의 방관자, 혹은 생의 의욕을 찾지 못해 그저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가이가 그와 같은 길로 걷지 않은 건 걸이라는 가이의 구원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걸은 사랑에 있어서는 극히 수동적인 여성이다. 새로운 사랑인 가이가 걸에게 다가서려 해도 걸은 그녀의 속마음을 모국어로만 표현하지, 가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건 걸의 소극성을 보여주는 연출이다.

▲ 뮤지컬 ‘원스’ ⓒ신시컴퍼니
동시에 떠나간 남편을 아직도 마음에서 밀쳐내지 못한 ‘한 남자의 아내’라는 걸의 정체성이 가이라는 새로운 사랑을 밀치는, 인력과 척력의 대립으로 바라볼 수 있다. 가이는 걸에게 다가서고자 하는 인력으로 다가오지만, 반면에 걸은 유부녀라는 자아정체성 때문에, 아니 아직도 떠난 남편을 잊지 못하기에 가이를 밀쳐내려고 하는 척력 말이다.

영화와 다른 연출은 무대만이 갖는 저력이 아닐까 싶은데, 2막에서 배우들의 마임은 기존 뮤지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색다른 창의성을 뮤지컬에 덧입힌다. 배우는 대사나 넘버가 아닌 몸짓 언어 마임으로 대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관객의 감성에 탄력을 덧붙이는 건 아까도 언급한 음악의 힘이다. 영화를 통해 익히 아는 넘버가 스트레이트라면, 아카펠라 선율로 잽을 날려 객석의 감성을 넉다운시키기에 충분한 가공할 음악의 저력을 <원스>는 잊지 않고 있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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