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8일 서울시가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을 취소한 이후 시작된 인권운동 진영과 박원순 서울시장의 대립이 11일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농성단’이 6일 간의 서울시청 점거농성을 마무리하면서 일단락됐다. 무지개농성단과 박원순 서울시장은 10일 면담을 했고 서울시민인권헌장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 했지만 박 시장의 나름대로 진솔한 사과를 들었고 내년 1월에 다시 면담하기로 했다.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과 관련해서 보여준 행보는 명백하게 ‘실책’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인권 문제의 원칙적인 측면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이 문제에 관해선 이미 여러 군데에서 훌륭한 비평이 나왔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그랬다.
'동성애 지지 안한다'는 인권변호사 출신 박원순 시장이 고수할 수 없던 입장, 명백한 '실책'
박원순 서울시장은 성소수자인권단체와 시민사회단체 대표 6명과의 면담과정에서 몇 번이나 사과를 해야 했는데, 이는 단지 인권헌장의 파행 문제 뿐만 아니라 지난 1일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임원들을 만나 했다는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서울시 대변인도 확인해준 이 발언은, 다른 정치인이 했다면 ‘무지의 소산’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인권변호사였던 박 시장이 고수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었다.
박원순 시장이 중도파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겠으나 원칙주의자들이 항의하면 뒤집을 수밖에 없었던 발언을 하고 이를 공식적으로 섣불리 인정한 건 ‘실책’ 이외의 말로 설명할 길이 없다. 일부 기독교인사를 만나 면담한 노력이 무위로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다. 일단 박 시장과 서울시는 페이스북과 보도자료에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발언을 골라 이 모순을 봉합했으나 향후에도 이건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 혐오발언을 불시로 하는 이들과 인권운동가들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 성소수자 인권단체 회원들이 6일 오후 서울시청에서 성소수자 차별금지를 명시한 인권헌장을 거부하고 보수기독교단체와 면담에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 박원순 서울시장 규탄 농성을 시작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원순 시장은 왜 '실책'을 하게 됐을까?
그렇다면 박원순 시장이 이런 ‘오판’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정도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우리 편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측면이다. 다른 하나는 ‘상대편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측면이다. 현재 박원순 서울시장은 아마도 역대 한국 사회 제1야당의 정치인 중에서도 시민사회 운동세력은 물론 진보정당의 활동가들과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이일 것이다. 적어도 이번의 ‘실책’ 이전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이 우호적인 관계는 정책적 유사성의 문제보다는 물적 조건의 문제에서 기인한 부분이 더 컸다. 지금껏 제1야당 정치인 중에서 진보적 활동가들의 생계에 큰 도움이 된 이는 없었지만, ‘박원순의 서울시정’은 그 성격상 지역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려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한 진보정당의 활동가는 지난 지방선거 이전 “서울시가 추진하는 사업에 지역 활동가들이 들어간 것들이 많은데, 그러다보니 다른 민주당 후보에게 무심했던 것보다는 훨씬 박 시장의 재선을 바라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특수관계’(!)가 박원순 서울시장으로 하여금 ‘진보 진영의 비판 활동’을 오판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
▲ 박원순 서울시장이 12일 오전 서울시청 기획상황실에서 치안협의회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는 위원장인 박원순 서울시장과 구은수 서울지방경찰청장, 박종길 서울지방고용노동청장, 김관성 서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장 등을 비롯해 재계·학계·종교계·시민단체 대표들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이에 누군가들은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판하는 운동세력을 “편협하고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원순 시장 역시 운동세력이 어떤 종류의 문제에선 결코 물러설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 사람이다. 특히 성소수자 문제는 단순한 정책토론의 영역이 아니라 어떤 이들의 ‘존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박 시장과 그 주변 인물들은 ‘큰 그림’을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종류의 세밀한 영역의 원칙들을 지켜나가거나 적어도 결정적인 훼손을 범하진 않으면서 ‘큰 그림’을 살릴 방법을 지금부터라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시장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힘들 일이다.
박원순 시장의 지지 기반을 재확인해야 할 필요성
‘상대편에 대한 자신감’이란 무엇일까.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정몽준 시장에 대해 매우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수도권에서 이례적인 10% 가까운 격차의 승리에 심지어 강남에서도 신승을 거두었을 정도였다. 일부에선 이런 승리 때문에 “박 시장이 자신의 지지기반을 기본의 야권 후보와 전혀 다른 곳에 있다고 착각하는게 아니냐”라고 우려한다. 실제로 지난 지방선거 이후 박원순 서울시장의 캠프는 자신들이 2002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캠프가 치렀던 대선만큼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냈다고 자평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도 다소 우려스럽다. 박원순 시장의 두 번의 선거전에 대해선 냉정한 평가도 존재했다. 어쨌든 새누리당의 거물급 정치인인 나경원과 정몽준을 연거푸 꺾었으니 만큼 폄하할 수는 없지만, 의도했던 선거전이 제대로 통한 것인지는 또 따져봐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애초에 선거전에 대한 분석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는 심정으로 상대방의 역량을 크게 보고 이쪽의 역량을 냉정하게 보는 것이 더 현명하다. 또 변수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올바른 정치적 셈법이라면, ‘불확실한 이익’을 ‘확실한 손실’과 맞바꾸는 위험한 도박을 해서는 안 된다. 이번 건의 경우 전형적으로 개신교도들에 대한 ‘불확실한 이익’을 인권운동 세력에 대한 ‘확실한 손실’과 맞바꾸려 했던 것이다. 이 경우 저쪽의 규모가 설령 열배는 크다 하더라도 ‘손해보는 장사’가 되기 십상이다.
▲ 박원순 서울시장이 9일 서울 강동구 강동구민회관에서 열린 '2014 서울특별시 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지도자 대표의 결의문 낭독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유력한 야권의 대권주자지만, '본선'에 나갈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여전히 야권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다. 한국갤럽은 차기 대선주자에 대한 지난 주(2~4일) 예비조사와 이번 주(9~11일) 본조사를 종합한 월간 대선후보 지지율 조사 결과 박원순 서울시장이 18%로 5개월 연속 1 위로 꼽혔고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13%)이 뒤를 이었다고 12일 밝혔다(휴대전화 RDD 표본 프레임에서 무작위로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5명을 추출해 진행한 전화조사원 인터뷰. 표본오차는 ±3.1% 포인트 95% 신뢰수준, 응답률은 16%).
이 조사는 여권 후보로 김무성, 김문수, 정몽준, 홍준표, 야권 후보는 문재인, 박원순, 안철수, 안희정 등 8명을 선별해 조사했고 박 시장과 문 의원 다음으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7%), 안철수 새정치연합 전 대표(7%), 김문수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6%),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6%), 홍준표 경남도지사(4%), 안희정 충남도지사(3%) 순이었고 3%는 기타 인물, 35%는 의견을 유보했다. 5개월 연속 1위 박원순은 새정치연합 지지층과 무당층에서, 2위 문재인은 새정치연합 내 지지 기반이 견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새누리당 지지층(412명)에서는 김무성(14%), 김문수(10%), 정몽준(10%)이 모두 10% 선에 걸쳐 있어 뚜렷한 주자가 없었고, 34%는 의견을 유보한 반면,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층(206명)에서는 박원순(33%)과 문재인(31%)이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으며, 14%는 의견을 유보했다. 한편, 지지정당이 없는 무당층(336명)에서는 박원순(17%), 문재인(9%), 안철수(7%) 등 야권 인물 선호가 두드러졌다(의견유보 51%).
이는 무당파에 소구하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층 내부에서도 문재인 의원을 앞서는 것으로 박 시장에게 고무적인 조사결과다. 한편으로는 당내에 지지기반이 별로 없는 박 시장으로선 현행 수준 이상으로 지지층 내에서 문 의원을 앞서야 ‘본선’에 나설 전망이 높아지는 상황이다.
▲ 박원순 서울시장이 10일 오전 서울시청 브리핑룸에서 지하철 양 공사 통합을 골자로 한 '지하철 통합혁신 구상'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원순 시장이 계속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이들의 견인차'가 되려면...
박원순 시장에 대한 현재의 지지는 새정치민주연합을 지지한다기 보다는 ‘반새누리 성향’이 확고한 유권자들이 ‘새누리당 후보를 꺾을 수 있는 이’로 박 시장을 꼽고 있는 상황이다. 즉, 현재 박 시장은 ‘정권교체가 열망인 이들’을 견인하는 기관차다. 이번 사태에서 많은 야권 지지층이 성소수자나 성소수자 운동을 폄하하는 발언을 한 것도 박 시장이 그 ‘기관차’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으니, 박 시장은 본인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폄하 발언이 난무하게 한 상황을 반성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다른 야권 후보와 차별성을 높이기 위해선 ‘정권교체가 열망인 이들’ 뿐만 아니라 ‘누구의 승리에도 무심한 이들’에게 소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특히 언론, 문화산업, IT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정권 교체의 낙차가 뚜렷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들은 결코 덩치가 작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다수 서민대중의 대부분을 포괄하는 부문들은 아니다. 박 시장이 여타 야권 경쟁자들에 비해 확실한 비교우위에 서 당내 기반의 차이를 무력화시키려면 정권교체의 낙차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다수 서민대중을 끌어모을 수 있는 제1야당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만 한다.
박원순 서울 시장은 서울시정의 영역에서는 특유의 생활인의 편리를 위한 꼼꼼한 행정으로 그 영역을 메꾸어왔다. 그러나 만약 박 시장이 대권에 뜻이 있다면 대선후보 경쟁의 영역에선 ‘미시적인 것’만으로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번 박 시장의 인권헌장 철회를 두고 단지 인권운동 진영 뿐 아니라 “저렇게 소심한 사람이 국가 단위의 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까?”란 의구심을 품은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이전에 지적한 바 있다.
‘잘못된 길’을 ‘번복’한 건 그 자체로 나쁘지 않은 수습이나, 박원순 서울시장이 정치적 반대세력의 저항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뚜렷한 갈등상황에서 어떤 방식의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정치인 박원순’의 역량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다. 만약 그 영역에서 박 시장이 역량을 보여줄 수 있다면 사람들은 이번 사건을 ‘실책’이 아닌 ‘실수’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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