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이병순 KBS 사장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기계적 중립주의라도 지키겠다”고 발언했다. 주호영 한나라당 의원이 KBS의 공정성·중립성 확보방안을 묻자, 이미 KBS 안에서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는 있는 ‘기계적 중립주의’를 이병순 사장이 다시 꺼내든 것이다.

▲ 지난 13일 국회에서 열린 한국방송공사, 한국교육방송공사, 방송문화진흥회에 대한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병순 KBS 사장이 의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여의도통신
이날 국정감사에서는 KBS의 정치적 중립성 문제가 집중 제기됐다. 민주당은 이 사장 취임 이후 KBS가 정권에 편향된 방송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한나라당은 정연주 전 사장 시절 KBS의 방송이 편향됐다고 지적했다. 중립성을 요구하는 한나라당의 주장은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데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장이 내놓은 답변 역시 전혀 새롭지 않다.

눈여겨볼 대목은 한나라당이 독립성이 훼손된 공영방송에 중립성을 요구하는 태도다. 정치적으로 독립되지 않으면 중립성도 보장될 수 없다. 정치권력 변화에 따라 공영방송의 중립성이 재단되고 있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으며, 특히 정치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공영방송을 휘두를 수도 있다. 그러나, 중립성 요구에 앞서 전제돼야 할 공영방송의 독립성 보장에 대해 한나라당이나 이병순 사장이나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한나라당의 중립성 요구는 친여 성향을 강요하는 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병순 사장이 내놓은 ‘기계적 중립주의’는 과거 박권상 시절 KBS 보도국의 이념이며 정연주 시대의 가치였다. 따라서 이병순 사장의 ‘기계적 중립주의’는 새로운 개념이라고 볼 수 없다. 아니 역으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KBS가 언제 ‘기계적 중립주의’를 포기한 적이 있는가?

KBS가 진보진영의 담론을 의제화해 보도하는 데 충실했는가라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진보인사가 몇 명이나 될까? 100개의 기사를 보도를 했다면 1개 정도나 진보적 관점에서 보도했을 수 있다. 하지만 50개 이상은 보수적 관점이라는 사실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KBS 보도에서 노동자·농민들의 파업과 집회를 친절하게 보도한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기계적 중립주의는 이미 KBS 보도국 기자들에게 체질화돼 있다. 그 가치는 어디까지나 ‘조작과 왜곡이 판치는 독재정권의 상황에서 기계적 중립성은 민주주의에 기여한다’는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빠른 속도로 발전해왔던 지난 10여 년의 과정에서는 ‘기계적 중립주의’는 오히려 민주주의 발전의 걸림돌로 작동해 왔다. 기계적 중립주의는 민주주의 발전 단계에서 진보적 담론을 담을 수 없는 ‘구시대 그릇’으로 기능했고, 공영방송 KBS의 보도가 진보진영의 비판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원인도 ‘기계적 중립주의’에 있었다. 낡은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환경을 담을 수 없는 이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기계적 중립주의마저 진보적인 이념처럼 보이게 했던 세력의 현신인 한나라당이 방송의 중립성을 주장하고, 이병순 사장은 기계적 중립성으로 화답하고 나선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확인된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이병순 사장이 제기한 ‘기계적 중립주의’란 민주주의 퇴행을 의미하지만, 기계적 중립주의라도 지켜졌으면 하는 바람은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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