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모집보다는 인맥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각 프로그램에 들어가야 글 쓸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프로그램 담당 PD와 서면계약조차 하지 않고 일하는 경우도 빈번해 고용 안정성을 기대할 수 없다. 방송이 나간 이후에야 원고료를 받을 수 있고, 방송이 취소되거나 연기될 때에는 무임금 상태가 지속되며, 4대 보험 혜택은 받지 못한다. 당연히 시간외 수당, 연차, 보너스, 연금 등의 복리후생을 기대할 수 없다. 교양작가 기준으로 신인작가와 보조작가의 경우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주당 20~25만원을 받을 만큼 원고료가 높지 않으며, 프로그램이나 제작자의 특성에 따라 노동강도에도 차이가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방송 프로그램의 원활한 가동을 위해 글을 쓰고 있을 방송작가들, 특히 여러 가지 면에서 제작환경과 관행이 다른 ‘드라마’를 제외한 분야의 방송작가들이 처한 현실이다.

외주제작사 표준계약서, 방송스태프 및 출연진 표준계약서에 이어 방송작가들에게도 안정적인 집필 환경 등 최소한의 권익을 보장해 주자는 내용의 ‘표준집필계약서’ 도입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0일 오후 2시, 서울 목동 방송회관 3층에서 한국콘텐츠진흥원 주최로 <방송작가 표준집필계약서 도입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방송작가들의 집필환경 및 근로환경 실태조사 결과가 다뤄졌고, <방송작가 표준집필계약서>(이하 <표준계약서>)의 주요 내용이 소개됐다.

유은혜 변호사는 “방송사 또는 제작사와 작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서 당사자들의 권리 및 의무 관계를 공정하게 정해, 현실에서 약자 위치에 놓여있던 방송작가의 법적 지위를 보호하기 위해 <표준계약서>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표준계약서>는 방송사 또는 제작사가 제작하는 방송프로그램의 극본 집필에 참여하는 모든 작가가 계약 당사자가 된다. <표준계약서>에는 4대 보험 가입 가능, 의무사항, 부당한 계약취소의 금지, 집필활동 부당거부 금지, 원고료 지급보증, 저작권, 권리와 의무 양도, 협찬 및 간접광고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원고료 항목에는 “계약금 및 1차 중도금, 2차 중도금, 잔금 등에 대한 명확한 금액 및 지급시기, 원고료 세부내역을 명시할 것”이, 저작권 항목에는 “극본에 대한 저작권 등 권리는 ‘작가’에게 귀속되며 2차적 사용, 2차적 저작물에 대한 사용은 ‘작가’에게 사용료를 지급하는 것으로 한다”이 나타나 있는 방식이다. 또한 원고료 미지급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방송사에게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두었다.

“후배 작가들은 일에 더 전념할 수 있었으면…”

이날 토론회에서는 작가들의 열악한 여건을 알 수 있는 ‘생생한 경험담’과 함께, 이 같은 환경 개선을 위해 <표준계약서>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 10일 오후 2시, 서울 목동 방송회관 3층에서 한국콘텐츠진흥원 주최로 <방송작가 표준집필계약서 도입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미디어스)

<한국의 미>, <현장기록 요즘 사람들>, <일요토론> 등 주로 KBS에서 교양물 중심으로 집필활동을 해 온 손동은 작가는 “드라마 쪽은 계약서 작성이 일반화됐지만 (비 드라마 작가는) 80년대에 일을 시작한 저 같은 경우도 계약서 쓴 게 열 손가락 미만일 정도로 계약서가 거의 없다”며 “쓴 경우는 방송사가 '선수금을 주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계약서가 태반이었다”고 말했다.

손동은 작가는 “제가 썼던 방송을 가지고 학습만화나 책을 만들 때 2차 저작권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미 책이 나온 뒤, 작가들이 상황을 알고 작가협회 협조를 받아 미약하게나마 사용료를 받았던 경우가 있다”며 “표준계약서가 시행돼서 현재 서브, 막내작가들이 메인작가가 될 때에는 (그들이) 일 자체에만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표준계약서>에 방송제작기간과 원고료 지급시기를 명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KBS <각시탈>, SBS <그린로즈> 등을 썼고 드라마 데뷔 전 지역방송사에서 오랫동안 구성작가로 활동해 온 유현미 작가는 ‘표준계약서 제정보다는 각 방송사와 한국방송작가협회가 맺는 협약에서 작가협회에 힘을 실어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민영동 한국방송협회 부장의 의견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협회는 협회 회원들을 위해서만 일한다. 하지만 초보작가, 서브작가가 방송작가협회 회원일 수는 없다. 메인작가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기본적인 수순이 초보작가, 서브작가인데 그들의 노동강도와 여건은 앞서 충분히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역방송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방송 공영성을 위해서라도 초보작가 처우에서 기본권은 해결해야 된다”

유현미 작가는 “드라마는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집필계약서를 썼지만 2차 저작물이 어떻게 방송되고 이후 어디로 가서 활용되는지 관련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대개 작가들은 자신의 2차 저작물이 어떤 경로 거쳐서 나가는지 전혀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며 “수익을 포함해 2차 저작물에 대한 정보도 공유할 수 있다는 마인드 전환이 절실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비 드라마, 드라마 작가 여건이 너무나 다르다”

그러나 이번 <표준계약서>는 제작사-작가, 방송사-작가 간의 구분만 있을 뿐 종사하고 있는 프로그램 장르에 따라 발생하는 ‘차이’를 담아내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드라마 제작사 도레미엔터테인먼트의 김운호 본부장은 “이런 토론회에서 정확하게 각자의 이해관계를 이야기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드라마와 비 드라마의 환경이 너무나 다르다. 3시간 토론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며 “가장 힘든 건 모든 방송사, 제작사, 작가 등 당사자들이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이다. 콘텐츠를 만들 때 서로의 권리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상생’을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운호 본부장은 “예능 교양쪽과 달리 드라마쪽은 제작사가 오히려 작가의 요건을 쫓아가지 작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렇듯 구체적인 사항을 빼고, <표준계약서>라는 이름 아래 뭉뚱그려서 얘기하고 있어서 논점이 상당히 흐트러져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드라마 제작사 로고스필름의 안종남 대표 역시 “오늘 들으면서 ‘이 자리의 논의 상당 부분이 드라마쪽하고는 관련이 없는데…’라고 생각했다. (방송작가들의 열악한) 작업여건은 드라마하고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 같다”면서 “<표준계약서>를 4가지 버전으로 만드는 것을 제안드린다. 드라마/비 드라마, 방송사/제작사로 나눈다면 (작가별로) 더 간단히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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