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회 문건’ 정국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검찰 수사만을 두고 보자는 입장이다. 이른바 보수언론인 ‘조중동’에서조차 김기춘 비서실장이나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 등 ‘문고리 3인방’의 책임론을 말하는 시점에서도 그렇다. 그래놓고 “실세는 진돗개”라고 농담을 하니, 국민들은 정윤회씨가 “토사구팽을 당하는 사냥개 신세… 앞으론 진돗개가 되겠다”라고 말한 것과 엮어 마치 그들이 비밀연애를 하는 아이돌 가수처럼 ‘사랑의 밀어’를 나눴다고 보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정윤회씨의 사적인 관계를 의심하는 것은 근거도 없고 사회 문제 해결에 도움도 안 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이 아수라장에 대한 책임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남 탓’과 ‘검찰 수사 기다릴 것’ 운운하니 사람들의 반응이 비생산적으로 흘러가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런 와중에 검찰의 낮아진 위상이 눈에 띈다. 대통령의 발언을 ‘가이드라인’으로 해석하는 야권의 주장에 반드시 동조할 필요는 없다. 그렇더라도 대통령이 마치 검찰 수사의 결과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발언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직접 챙긴 일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상 일을 다 아는 것도 아닐 텐데 아무 문제도 없을 거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박근혜 대통령의 최근 태도는 ‘진실’을 알고 있기에 나오는 자신감이라기 보다는 ‘위계서열’이 엄정하게 확립되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자신감인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진돗개가 실세”라는 농담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농담의 표면적 의미는 ‘나는 꼭두각시가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통치하는데 무슨 놈의 비선논란이냐’라는 정서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통치하는데’에 더 집중한다면 추가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어쩌면 대통령은 수하들에게 “너희들은 내게 진돗개만큼이라도 기쁨을 주느냐”라고 질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7월 23일 오후 서울 금천구 대륭테크노타운을 방문, 아이디어 창업기업의 하나로 한 반려동물 사료 서비스업체를 찾아 관저에서 키우는 진돗개 '희망이'와 '새롬이'의 사료를 주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러한 대통령의 태도는 검찰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분위기를 보면, 채동욱 전 검찰총장에 대한 ‘찍어내기’ 논란 이후 힘이 빠진 것이 보인다. 법조기자들은 “말 잘 듣는 이들이 잘 나가는 시대가 온 거다”라고 진단한다. 한 법조기자는, “사실 언론에서 흔히 묘사하는 ‘공안통’과 ‘특수통’의 대립하는 식으로 딱딱 나눠지지는 않는다. 그저 전반적으로 보신에 치중하는 분위기가 있다”라고 진단한다. 다른 법조기자는 “정권이 검찰에게 권력을 수사하지 못하게 하면 기업인 수사라도 하게 해줘야 하는데 경제활성화다 뭐다 해서 기업도 못 건드리게 하니 굉장히 갑갑해한다”라며 검찰의 분위기를 전한다.
정권 초기, 검찰은 재계를 전방위적으로 수사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 꾸준히 정보가 축적되어 왔지만 수사되지 않았던 ‘CJ 비자금 수사’의 속도를 보고 나온 평가였다. 박근혜 정부가 4대강 건설사 담합까지 수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섞인 전망도 나돌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지금 다시 돌아본다면 이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조성한 분위기였을 뿐 박근혜 정부의 의중이 아니었다. 박근혜 정부는 검찰 조직에게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보장하려는 의중은 없었고 정권의 심기를 정확히 맞춰줄 수 있는 하인을 원했다.
‘정윤회 문건’이 터진 이후 보수언론들조차 레임덕을 염려한다. 임기 말에나 있을 폭로전이 임기가 반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나오고 있으니 현상적으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서 문제가 터져나오는 양상은 다소 특이하다. ‘대통령의 권한이 약해져서’ 레임덕이 오는 게 아니라 ‘책임을 진 이들이 대통령을 너무 두려워해서’ 일이 잘 안 되고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이들만 남아 있는 구조인 듯하다.
내각에선 대통령 얼굴도 보기 힘들다는 장관이 넘쳐나고 그렇기에 ‘문고리 3인방’이 강하다고들 하는데, 청와대 내부에선 문건에서 ‘십상시’에 포함된 멤버들조차 청와대 분위기를 힘들어 한다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현재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체육관광부 국과장 인사에 개입했다고 증언하는 유진룡 전 문체부장관은 내각에서 급하게 경질된 이다. 청와대든 내각이든 검찰이든 ‘대통령 눈치’만 보는 상황인데, 그 엄정한 기강(?)을 견디지 못하고 나간 이들이 문제를 폭로하는 정국이다.
즉 박근혜 정부의 레임덕은 대통령의 힘이 빠져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지나치게 사람들을 쪼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런 상황에선 '레임덕적 현상'이 발생하더라도 대통령의 힘이 빠지느냐 여부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한 정치부기자는 “여당이나 야당이나 대권주자가 뚜렷하게 세워지지 않았고 확 치고 나가는 대권주자가 없다. 박 대통령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층’만이 문제가 아니라, 정권 지지율이 낮아져도 다음 주자가 그 지지를 흡수를 못하는 상황에선 대통령의 힘이 빠지기가 어렵다”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상황에선 ‘레임덕’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권 말에도 특히 검찰이 정권을 견제할 수 없는 경우가 올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검찰의 행태를 본다면, 아마도 그들은 확실한 여당 주자가 존재하거나 정권교체의 전망이 높게 보일 경우에야 정권 말에라도 ‘대통령 측근’에 대해서도 소신 있는 수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러한 조건이 오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는 예측이다.
결국 청와대에 ‘통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거주’를 위해 들어간 것 같은 대통령이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현재의 한국 사회의 난맥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정치인이 없어서 체제 개혁은커녕 기존 제도의 견제장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 볼 수 있겠다. 여권 주자는 대통령에 맞서지 못하고 야권 주자는 성소수자 운동가들과나 갈등을 빚는 ‘정치’란 영역 자체의 약화가 임기 내내 더 심화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소란과 아수라장 속에서 정치인과 정치세력들은 ‘기회’를 봐야 마땅하겠지만, 한국 사회와 정치의 관성은 아직까지 마땅한 균열의 지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