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의 '곤혹'이 계속되고 있다. 물론, 박 시장의 자업자득 성격이 짙다. 서울시는 여전히 서울인권헌장에 대해 “표결 처리는 최종적으로 합의에 실패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시민·전문위원 180명이 만든 인권헌장 선포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서울시의 이 입장과 침묵을 근거로 공청회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동성애 혐오론자들은 인권헌장이 무산된 것이라 호도했다. 박원순 시장 역시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임원들에 사과하며 “인권헌장도 합의가 중요하다”, “사회갈등이 커지면 안 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발언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인권단체들의 서울시청 긴급 농성은 그렇게 시작됐다.

서울시청 농성은 성소수자들이 주축을 이뤘지만, 속속 연대단체들이 농성장을 채웠다. 시민위원들이 제정한 인권헌장을 서울시가 선포하지 않는 것은 성소수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다. 이번엔 성소수자의 문제가 논란이 됐지만 그 다음은 또 어떤 소수자가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얘기도 농성장 주변에 많다. 박원순 시장의 ‘인권, 합의’ 발언 때문이다.

▲ 12월 7일 성소수자 차별 반대 인권단체들이 서울시청을 농성에 돌입한 가운데 두번 째 촛불집회에서 윤가브엘 대표는 "에이즈와 동성애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인해 에이즈 예방은 안되고 감염자에 대한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고 비판했다ⓒ미디어스
인권은 합의의 대상인가

인권헌장 논란부터 봐야겠다. 이번에 논란이 된 문구는 단지 ‘동성애 차별 금지’였다. 소수자들에게 특혜를 주자는 내용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기독세력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새로울 건 없었다. 보수 기독세력들의 혐오발언과 폭력 행사가 문제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동성애 차별을 조장해왔던 세력이란 얘기다. 그래서 오히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들의 '폭력'이 아니라, 서울시와 박원순 시장의 일처리 과정이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동성애 혐오 발언들을 서울시는 한 ‘의견’으로 받아들였다. 인권 변호사 출신 시장의 행정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박원순 시장은 인권헌장공청회에서 사회자의 멱살을 잡고 회의 진행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혐오발언으로 동성애자들을 모욕한 세력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에 ‘인권은 합의의 대상’이라는 규정을 던졌다. '합의'란 무엇인가. 그의 인식에 따르면 나와 다른 이들의 인권은 반대해도 되는 것이고 양보해도 된다는 얘기가 된다.

▲ 성소수차 차별 반대 인권단체들이 박원순 서울시장의 면담을 촉구하며 시청 농성에 돌입했다. 사진은 농성장에 걸려 있는 한 피켓의 모습ⓒ미디어스

인권은 정말 합의의 대상인가. 만일, 박원순 시장의 말대로 인권 기준에 있어 ‘합의의 대상’이라는 말이 통용된다면 늘 합의에서 배제될 소수자들이 설 자리는 어디일까. 그래서 문제다. 이번에는 동성애자들이 대상이지만, 그 다음은 또 어떤 소수자가 타깃이 될지 모른다. 혹여, ‘장애인 차별 금지’라는 문구를 빼자는 다수의 요구가 있다고 치자. 다수가 합의를 해주지 않는다면 장애인들은 당연히 누려야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해야하는 것인가. 박 시장의 발언은 매우 위험하다. 학생인권, 이주인권, 여성인권, 비정규직의 노동권 등 모든 것을 '합의'라는 미명으로 후퇴시킬 수 있는 전제가 될 수 있다.

절차도 문제다. 시민위원과 전문위원들 180명은 동성애 차별 금지 조항이 들어가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그것이 서울시민들이 생각하는 인권의 기준이다. 그렇지만 그 후, 서울시는 시민위원들이 직접 제정한 인권헌장을 “무산됐다”고 주장했다. 민변이 서울시의 행정이 민주주의 후퇴를 불렀다고 비판하는 이유다. 서울시의 일방적 입장은 인권의 문제를 표결로 처리해야하는지 논란과 별개로 절차적 민주주의까지 훼손했다.

인권헌장 그리고 정치적 책임의 무게

성소수자차별반대 인권단체들의 서울시청 농성을 지켜보며 내내 머릿속에 남은 문구는 인권연구소 창 류은숙 상임활동가의 ‘정치적 책임’이라는 발언이었다. 류 상임활동가는 이날 “성소수자 차별반대 인권단체들은 박원순 시장과 정치적 책임을 같이 지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는 A를 지지했지만 B로 결정됐기 때문에 그 결과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책임이라고 볼 수 없다”도 설명했다.

▲ 박원순 서울시장은 인권헌정을 위한 '동반자 카드'에 "힘없는 사람을 위한 방패로서의 인권헌장!그런 헌장을 만들고 지켜갑시다"라고 적고 사인했던 바 있다.

지난 6·4지방선거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 시장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순수하게 박 시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표를 준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새누리당 나경원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박 시장에게 투표를 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개인의 선택에 따라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류은숙 활동가의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들 선택과는 별개로 박 시장이 당선된 데에 있어서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책임이 있다는 말이었다. 책임을 지기 위해 농성을 시작했다는 이들. 그렇다면 당사자인 박원순 시장은 현재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가. 이제는 박 시장이 답을 해야 할 차례가 아닐까 싶다. “인권헌장 그리고 성소수자의 인권은 특정 세력에 의해 박탈되어도 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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