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이래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물이 몇 있다. 개, 소와 말은 인간의 문명사와 함께 발자취를 남겼다. 자동차와 열차가 발명되기 전에 인간은 말을 타고 장거리 이동을 함으로써 시간과 거리를 단축할 수 있었다. 전쟁을 할 때에도 말은 없어서는 안 되는 동물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워 호스>만 하더라도 말이 전쟁 수행에 있어 선택이 아닌 필수 조건이었다는 걸 볼 수 있다.

역사상 최강의 군사력을 보여주었다는 몽골군이 전투를 할 때에는 달리는 말만 보이지 말 위에 탄 몽골군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왜일까. 말 위에 올라탄 몽골군은 적이 공격하기 쉽다. 때문에 몽골군은 전투 시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말 위에 타는 게 아니라 말의 옆에 타고 달렸다고 한다. 그런데 파란 눈을 한 서양 기수가 서울 한복판에서 칭기즈칸 당시의 몽골군처럼 옆으로 말을 타고 있었다. 바로 <카발리아>에서 말이다.

▲ 사진 cavalia international S.A.R.L
<카발리아>는 50여 마리의 말이 관중의 눈을 현란하게 만든다. 말이 달리는 건 TV 올림픽 중계나 경마장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카발리아>에서 펼쳐지는 말의 질주는 관객에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TV라는 가상의 복제물, 시뮬라크르를 통해 말을 간접으로 접했던 관객은 실물로 달리는 말의 질주에 경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달리는 말을 옆으로 타는 것도 힘든데, <카발리아> 기수들의 도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한 술 더 떠 두 마리의 말 위에 한 발씩 딛고 서서 타기까지 한다. 경탄을 금할 길이 없다. 마상 경기처럼, 서서 달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두 마리의 달리는 말 위에서 장애물을 뛰어넘어 다시 말 위로 착지하는 장면을 보는 건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이는 서커스를 보는 게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관객에게 보여주는 수준의 묘기에 다다르기 위해 뼈를 깎는 훈련을 감내하는 게 눈에 보여서라고 한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이 정도로 치밀하게 움직이려면 얼마나 오래 인간의 조련을 받아야 했을까 싶다.

▲ 사진 cavalia international S.A.R.L
나쁜 말로 표현하면 얼마나 많은 채찍질을 당해가며 훈련했을지 동물애호가라면 아찔할 텐데, 다행히도 <카발리아>에서는 강도 높은 채찍질이 없었다고 한다.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참아주고 기다리는 훈육의 방식으로 말을 길들였다고 하니 말이다. 동물애호가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카발리아>는 동물 친화적인 마인드의 공연이 아닐 수 없다.

서커스의 중심은 인간이기 마련인데, 말이 인간보다 중심이 되는 <카발리아>는 인간 중심주의적인 가치관에 경종을 울리기도 한다. 마치 인간이 자연의 중심인 양 자연을 잣대질하고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훼손하기를 즐겨하는 것이 인간일진대, 말과 인간이 교감하는 정점을 보여주는 서커스 <카발리아>는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걸 보여주면서 동시에, 인간과 자연의 유대를 새삼 환기하도록 만들어주고 있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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