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시’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의 마음에 한 방에 불을 지를 수 있는 ‘마법의 단어’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관심이란, 사회 문제의 해결에 대한 시민적 권리의 행사라기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모범으로 삼는 군담소설 류의 영웅 예찬의 주인공을 누구로 생각하느냐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담론에서 가장 멀리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국 사회의 운동세력 역시 러시아산 혁명적 군담소설들의 등장인물들에 감정이입하는 것으로 보이니, 이 경향성은 하루 이틀 내에 사라질 일이 아니다.

‘주군’과 ‘가신’, ‘거사’와 ‘도모’와 같은 단어들이 소년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이 세계에서 ‘십상시’란 말은 ‘권력자의 눈과 귀를 가리며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이권 집단의 무리’를 뜻한다. <삼국지연의>를 읽는 것을 무슨 교양처럼 추천한 이 사회에선, '십상시'라는 비유는 한두 번 나온 게 아닐 것이다. 가령 오랫동안 보수세력의 책사로 불린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은 2000년 총선 승리 이후 2002년 대선 전까지 이회창 총재의 눈을 가린 이들을 자신이 '십상시'라 불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윤여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경험한 그 이익 집단의 무리가 7~8명이라도 두 세 명을 추가하여 ‘십상시’로 만들었을 것이고, 12~3명이라도 상대적 ‘쪼렙’들을 강제 구조조정하여 ‘십상시’로 만들었을 것이다. 사실 역사 속의 십상시도 주요 인물은 대여섯 명이었고, 상대적 ‘쪼렙’들까지 포함시키면 열두어 명이었다. 그리고 십상시의 난을 진압한 원소가 죽인 환관의 수는 단지 열 명이 아니라 이천여명에 달했다.
이처럼, 이 나라에서 권세가의 측근이라면 자신이 언제든지 환관에 비유당할 수 있는 운명이란 것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또한 '십상시'란 말을 즐겨쓰는 이들도, 실제 '십상시'와 같은 존재가 있을 거라 확정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정윤회 건에 대해서도 야당은 이 지점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 새정치민주연합 비선실세국정농단 진상조사단장 박범계 의원(오른쪽 둘째)이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진상조사단 1차 회의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현 시점, 새정치민주연합은 ‘십상시’의 비유가 등장하는 문건의 폭로로 시작된 사건을 ‘정윤회 게이트’로 몰고 가고 있다. 사실 십상시의 비유는 문건이 폭로의 형식으로 주장한 정윤회의 행보에 걸맞지 않다. 문건이 묘사하는 정윤회는 일종의 ‘밤의 비서실장’으로,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문고리 3인방’과 함께 김기춘 비서실장 이상으로 정국을 통제했다.
십상시는 자신들의 권력과 이권만을 추구했기에 동업자 관계였지만, 문건의 정윤회는 대통령과 정권의 안위를 위해 스스로 컨트롤타워가 된 사람이다. 이런 ‘비선’의 권력자들은 대체로 자신의 ‘주군’에게 “그에겐 사심이 없다”는 평을 들으며 전권을 쥔다. 그러므로 십상시에 가까운 인물을 찾으려면 대통령에 대한 상명하복으로 굳게 결속한 박근혜 정부 주변 인물보다는 일종의 ‘이권 동맹’이었던 이명박 정부의 주변 인물들을 거론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의 심복들이 워낙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 ‘환관’처럼 보일 지경이란 평은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문건에 나오는 정윤회의 행보와 ‘십상시’란 비유가 묘하게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 문건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할 근거인지도 모른다. 문건엔 ‘십상시’를 포함 사람을 자극할 말이 많지만, 정윤회가 무슨 일을 어떻게 망쳤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물론 ‘비선의 권력농단’은 그 자체로 비판할 지점이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들이 선택하지 않은 이가 권력을 행사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 시점에, 국민여론은 마치 나관중 <삼국지연의>의 하회를 기다리는 독자의 심정으로 정윤회를 둘러싼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인다. 포탈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나 SNS의 흐름을 본다면 그렇다.
▲ 현 정부의 숨은 실세로 불리는 정윤회씨의 국정 개입 의혹을 시사하는 청와대 문건 유출 당사자로 지목된 박모(48) 경정이 1일 오전 서울 시내의 한 경찰서로 출근해 잠시 머물다가 휴가를 내고 경찰서를 떠나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평가하는 것'은 또 다르다. 7.30 재보궐선거 직전, 여론은 "유병언 사체가 '가짜'가 아닐까"라고 묻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막상 새정치민주연합의 박지원 의원과 박범계 의원이 그 논란에 뛰어들자 사람들은 '새정치민주연합을 하찮게 평가했다'. 재보궐선거가 끝난 이후에야 언론은 결과를 분석하면서 박지원 의원과 박범계 의원의 대응이 좋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이번 일에서도 박지원 의원이 자신이 과거 만들었던 조어인 ‘만만회’를 내세우고 박범계 의원이 ‘비선실세 국정농단 진상조사단’의 단장을 맡았다. 여전히 그들은 ‘높게 평가받는 것’보다 ‘주목받는 것’을 중시하는 것 같다. 두 개의 목표를 구별하지 못하고 극단으로 가면 ‘일간베스트’가 된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 시절 5년 내내 ‘반MB정서’에 기대다 정권 교체에 실패했고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모든 선거에서 패배한 제1야당이 자신의 정치전술을 전혀 성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안타깝다. 검찰 조사가 문건의 내용을 부정한다면 맞게 될 '역풍'에 대한 걱정은 없는가.
게다가 지금의 박근혜 정부가 결코 민주적인 리더십을 행사한다고 볼 수는 없는 상황에서 '비선'을 비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정치적 반대파와 협상할 의사가 전무한 청와대가 언론에 대해서도 내부 사정을 설명하지 않는 '불통의 기관'으로 군림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 익명의 정부 관계자의 코멘트조차 청와대가 색출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여당 의원들조차 불만을 공개적으로 토로하지 못하는 이 시국에, 이 '불통의 통치'를 컨트롤하는 이가 박근혜인지 김기춘인지 정윤회인지를 가리는 일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심지어 일부 정치부기자들은 "정윤회는 제법 합리적인 사람이다. 차라리 그가 '비선'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경우조차 있다.
‘십상시’ 문건이 박근혜 정부 청와대의 치부를 드러낸 것은 분명하다. 문건이 사실이라도 치부요, 문건이 오류라도 그것이 청와대에서 만들어진 문건이기 때문에 치부가 된다. 그러나 이 치부로 장사를 해야 할 이들은 따로 있다. 여당인 새누리당이다. 막강한 권력의 대통령 통제 앞에 납작 엎드리던 이 당은 새로운 추문이 터지자 청와대와 야당 사이에서 역할을 잡아 보려고 한다. 김무성 대표는 전임 정부의 비리가 걸린 ‘사자방’ 국정조사와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맞바꿀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새정치민주연합 비선실세국정농단 진상조사단장 박범계 의원이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진상조사단 1차 회의 브리핑을 마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 시점 여당이 해야 할 일이 갈등의 조정이라면 야당이 해야 할 일은 갈등의 의제화다. 대통령이 사회문제 해결을 고민하는 방식으로의 통치를 포기하고 부족한 세수를 공무원 연금으로 막으려고 하는 현 시점에 집권을 바라는 야당은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조목조목 언어화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비전을 던져야 한다. 공무원연금 개혁, 임금제도 개혁, ‘중규직’ 신설과 같은 현 정부의 갈등 회피적 정책 노선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며 맞불을 놓아야만 한다.
하지만 현 시점 새정치민주연합은 사회적 갈등이 아니라 수권세력의 추문을 의제화한다. 권력자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오랫동안 민주화를 핵심적인 의제로 삼았던 제1야당은 그 ‘쉬운 일’에만 지나치게 익숙하다.
하지만 결국엔 ‘어려운 일’을 해야 수권정당의 이미지를 줄 수 있다. ‘어려운 일’을 처음부터 잘할 수가 없으니 자꾸 자꾸 해봐야 익숙해지고 실력도 늘 게다. 박근혜 정부의 허송세월만큼이나, 현 시기 야당의 허송세월은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시민사회의 기대를 배반하게 하는 비윤리적인 정치행위가 될 수 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 선거에서도 패배 후 ‘기울어진 운동장’이나 ‘유권자 의식’ 따위를 탓할 생각인지 궁금하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