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소개된 뮤지컬 가운데 이렇게 당당한 창작뮤지컬은 처음이었다. 초연이라는 건 창작뮤지컬이든 라이선스든 관객이 다시 사랑해주지 않으면 단 한 번 무대에 오른 다음에 멸종해버리고 마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셜록홈즈가 초연될 당시에는 시즌제로 앞으로 계속 나올 것이라는 걸 대놓고 암시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초연이 함량미달 수준의 등급인 채로 관객에게 선보였더라면 얼마든지 외면당할 수 있을 텐데, 대체 이 무슨 자신감이란 말인가.
셜록의 조수 왓슨은 누구나 알다시피 남성이다. 하지만 뮤지컬은 왓슨의 젠더를 과감하게 여성으로 탈바꿈해 놓는다. 이는 셜록의 천재적인 재능 가운데서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니는 셜록의 무책임함을 완화하는 여성성, 이름 하여 칼 융이 명명한 아니마를 왓슨의 여성성으로 탈바꿈해 놓은 듯하다.
당장 내야 할 집세를 내지 못해 셜록에게 집세를 재촉하는 왓슨의 모습은, 추리라는 모험만 추구하지 현실에서 물질적인 안정을 추구하지 못하는 셜록의 불완전함을 물질적인 충족으로 보완하고자 하는 셜록 스스로의 아니마를 왓슨의 여성성으로 대체한 설정이다.
셜록이 물질적인 궁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건, 천재적인 두되를 소유했음에도 ‘금융 브레인’, 재정을 안정시킬 줄 아는 금융 마인드가 셜록에게 부재하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또 한 명은 바로 이충주. 별안간 조명 아래로 물방울 하나가 무대 위로 똑 하고 떨어진다. 땀방울인가 하고 유심히 살펴보니 극에 너무나도 몰입한 나머지 연기하는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연기도 열정과 성의를 다해 선보이는데 가창력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충주는 연기와 가창력 모두 믿고 보는 뮤지컬 배우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