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22일자 <한겨레>신문 22면에 실린 사진. 박원순 당시 변호사는 세간에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이라고 알려진 그러나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사건'으로 명명되어야 할 사건의 담당 변호사였다.(사진 맨 왼쪽, 한겨레 지면 캡처)

박원순 서울시장님께 보여 드리고 싶은 사진 하나 있습니다. 이 사진은 열흘 전에 <한겨레>에 실렸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서울대 우조교 사건'으로 알려졌지만,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사건'으로 명명되어야 하겠지요. 이 사건은 성희롱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한국사회의 지독한 여성 차별과 편견에 맞섰던 여성인권사, 인권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저는 당시 박원순 변호사님이 이 사건의 변호인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일에 대해 지금도 감동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초자 인권운동가였던 저에게 인권운동가는 억압과 차별 받는 이의 편에 서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 그래서 인권운동가로 살게 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남성인 박원순 변호사가 나서서 여성의 인권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했다는 점은 지금의 박원순 시장님도 자랑스럽게 기억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박원순 서울시장님이 서울시민인권헌장 차별금지 조항에 차별금지사유로 성소수자를 명기했다고 해서 시민인권헌장을 폐기하겠다고 나서다니요. 20년전 성희롱 사건의 변호인으로 활동했던 박원순 시장의 그런 입장이라는 걸 확인한 저는 매우 당혹스러기만 합니다.

서울시는 서울시인권위원회의 의견을 수용하여 서울시민이 직접 참여하여 만드는 시민인권헌장 제정을 약속했습니다. 성별, 연령대별, 지역별 시민제정위원 신청자 중에서 추첨으로 선정했고, 거기에 인권전문가들을 결합시켰습니다. 180명의 제정위원들은 지난 8월부터 열정적으로 시민인권헌장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여섯 차례의 제정위원회 회의는 그 자체로 감동적인 과정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열띤 토론과 치열한 고민들이 녹아난 시민인권헌장이 지난 11월 28일 오후 11시 직전에 채택되었습니다. 물론 이 제정위원회 회의에서 성소수자 차별 발언을 쏟아내는 혐오주의자들의 집요한 방해가 있었습니다. 일반원칙 분과에서 활동했던 저는 그들의 발언 자체가 너무 끔찍한 혐오발언이어서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느라 너무도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5차례의 토론을 거치고도 합의되지 못한 사안이었습니다. 아니 합의가 불가능한 사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강남과 강북의 권역토론회, 이어진 공청회는 이들 성소수자 혐오세력에 의해서 어지럽혀지거나 무산되기까지 했습니다. 공청회 사회를 맡았던 저는 멱살도 잡히고 온갖 욕과 혐오적인 발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폭력과 폭언, 혐오발언을 서울시는 수용하겠다는 것인가요? 인터넷에 성소수자 혐오세력이 의견이랍시고 도배를 해놓고 있으니 이것도 시민의 의견이라고 존중하겠다는 것인가요? 애초의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이들은 서울시민인권헌장을 무산시키려고 안팎에서 집요한 방해를 해댔습니다. 이런 이들과 합의라니요. 차별과 편견의식으로 똘똘 뭉친 이들은 아예 대놓고 성소수자는 차별해야 한다고, 인권교육도 동성애를 조장하니 반대한다고 했는데 이들과 합의를 해야 한다니요.

서울시는 느닷없이 지난 11월 28일 마지막 6차 회의에서 표결로 시민인권헌장을 채택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냈고, 이제는 서울시가 나서서 집요하게 회의를 방해했습니다. 회의를 진행하는 사회자의 마이크를 뺏기까지 했고,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일삼던 위원들의 퇴장을 종용하기까지 했습니다. 막판 표결에 이르기까지는 이런 서울시와 성소수자 혐오세력의 집요한 방해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박원순 시장님, 시장님이 쓰신 <국가보안법 연구> 1,2,3권은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의 신념을 제게 불러일으켰습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고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심어주었고, 그런 저의 신념을 따라 지금도 저는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박원순 시장님이 지난해에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고 입장을 후퇴했습니다. 실망스러웠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속은 쓰렸습니다. 원칙을 하나하나 내어주고, 지켜야 할 가치를 포기하고 훌륭한 정치인의 길을 가시겠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성소수자 차별 문제는 20년 전의 성희롱 문제와 비슷한 사안입니다. 박원순 시장님이 너무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미 성소수자 차별 금지를 구체적인 차별금지사항으로 열거한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우리 나라에 만들어진 것은 2001년이었습니다. 광주시민인권헌장에도 지난해에 성소수자 혐오세력의 방해를 뚫고 제정된 성북구 주민인권헌장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 걸 성소수자 혐오세력이 반대하고 난리를 치니 서울시민인권헌장에서 빼겠다고요? 20년전 성희롱 사건의 변호사였던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가 맞나요? 성소수자 혐오세력들은 이제 서울시가 추진하는 도시계획헌장에서 성소수자만이 아니라 외국인도 삭제하자고 합니다. 서울시가 하나를 후퇴하니 또 하나 후퇴하라고 합니다. 또 포기하실 건가요?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인가요? 과거의 자랑스러운 기억도 함께 폐기하실 건가요?

지난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을 때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때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걸 하라고 만든 게 국가인권위원회다라는 한 마디로 정리했습니다.

▲ 인권 헌장 공청회 현장에서 박래군 소장은 밑도 끝도 없는 모욕과 구체적 폭력에 시달렸다. (사진=오마이뉴스)

박원순 서울시장님,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계시는지 모르지만 인권의 원칙을 지키는 그런 시장님을 보고 싶습니다. 20년 전 남성으로 여성의 인권을 지키는 변호사였던 그 박원순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편견과 차별에 맞서는 서울시장, 인권의 원칙과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는 그런 서울시장을 보고 싶습니다. 현실 정치를 앞세워 원칙을 포기하는 그런 박원순은 보고싶지 않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님, 어제 서울시 혁신기획관은 이번에 채택된 시민인권헌장은 자동적으로 폐기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서울시가 이를 선포하지 않을 것이니...자동적이라고 했지만 자동적으로 폐기되는 게 아니라 의지가 없는 성소수자 혐오세력이 두려운 서울시가 그들과 타협책으로 포기하니까 폐기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개신교의 표를 확보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대선가도로 달려갈 수 있을까요? 하나하나 원칙을 팽개친 현실 정치인의 모습에서 저는 무엇을 기대해야 하나요?

저는 박원순 서울시장님이 시민인권헌장을 선포할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아직도 저 사진 속의 박원순을 믿으니까요. 아직은 미련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인권의 원칙을 저버린 서울시장을 (아직은)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 사진 속의 박원순으로 돌아오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