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선영 기자로부터 창간 1주년을 맞는 <미디어스>에 대한 비판의 글을 청탁 받았다. 신랄하고 솔직하게 써 달란다. 욕먹기로 자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번 까볼까 싶다. ‘까다’. 여러 뜻을 가진 단어다. 예컨대 ‘앞에서는 착한 척하면서 뒤에서 남을 욕하는 행위’라는 나쁜 뜻이 있다. 주먹을 잘 쓰는 사람을 일컫는 데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원래의 뜻 대로다. 뒤에서 욕하거나 뭐 그렇게 하려는 게 아니라, 껍질 따위를 벗기려는 것이다. 껍질을 깨고 나오게, 속살을 드러내게 하려는 행위다. 실상을 확인․진단․평가하는 과정이며, 그럼으로써 정체를 쇄신할 기회를 모색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뜻으로 먼저 나부터 까본다. 명색이 미디어 부문 칼럼니스트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규찬은 우선 당신 스스로가 선언한 교전의 수칙을 정확히 지키고 있는가? 당신은 맨 처음 <미디어스>에 글을 쓰면서 뭐라고 했는가? ‘비평의 유격전’을 벌이겠다고 했다. “벼락같은 이성의 도끼질”에 열중하고, 자본권력과 국가권력, 매체권력, 지식권력에 결정적 펀치를 날릴 선수로 남겠다고 결기를 밝혔다. 대체 그 호언장담은 어디로 갔는가? 벤야민의 생각을 좇아 기민한 대중적 글쓰기의 게릴라전을 펼치겠다고 했는데, 과연 당신은 그 치열함과 맹렬함을 성실하게 견지하고 있는가?

아니올시다. 그러기에 당신은 너무 게으르다. 조중동이 늘상 이기는 게 재빠르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되지 않은 소리라도 먼저 질러 여론을 장악하는 그들의 솜씨를 배워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이리 느린가? 유격전을 제대로 펼치려면 매일은 몰라도 1주에 한 두 개씩 ‘무기의 비판’을 제시하고 ‘비판의 무기’를 생산해야 한다. 국가/권력이 맹렬하게 내뱉고 있는 살인적 ‘공포의 담론’에 맞설, 인·민 대중을 위무하고 언론 노동자를 보호할 역능적 ‘담론의 공포’ 효과를 내야만 했다. 그런데 보시라. 과연 제대로 속도전을 펼치고 있는가? 여론 형성의 힘을 제대로 내고 있는가?

의제설정의 게임, 프레임 전쟁에 진지하게, 열심히 참여하고 있냐는 말이다. 아니다. 당신의 언어는 여전히 현실로부터 떨어져 있고, 현장으로부터 멀리 있다. YTN 같이 시시각각 벌어지는 언론탄압의 현실을 생생히 묘사하기에 크게 부족하고, 현 정권의 폭력 남발을 비판·제어하기에 무리이며, 그래서 대중적 유대와 사회적 연대의 힘을 내도록 하는 데 한 마디로 역부족이다. 그게 다 게을러서다. 결정적 순간에 발언하지 않고, 핵심적 사안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태함이 원인이다. 시간 날 때 보내고, 생각나면 두드리고, 쓰고 싶으면 쓰는 지금의 모습에 비판의 ‘유격전’, 비평의 ‘게릴라전’이라는 표현은 절대 어울리지 않음.

이렇게 스스로를 까발리는 척하면서도, 과연 이후에는 보다 성실하게 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 그러하니 <미디어스> 편집장과 독자 제위께서는 냉정하게 교체를 생각해 보시길. 물론 김주완·김훤주 콤비가 계시다. 그래도 미디어 전문지에 걸맞게 매체 비평․분석에 탁월한 선수를 더 잘 활용해야 한다. 더 많이 포진시켜야 한다. 학계와 현업뿐만 아니라, 독자 대중들 중에도 미디어 문제, 방송 현실, 언론 위기에 관해 뛰어난 솜씨를 부릴 지식인이 많다. 미디어 관련 담론의 공간을 지금처럼 좁게 설정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전략적으로도 옳지 않다. 현실적으로도 안 통한다. 발굴은 물론 <미디어스>의 몫.

대중문화와 시사 칼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원음방송 김 피디처럼 열심인 분이 계신다. ‘투 김씨’와 더불어 지역에 거주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아무튼 여기서도 칼럼니스트 교체·보강이 절실하다. 영화와 드라마 비평 같은 대중적 부문을 통해 보다 많은 독자를 유인하지 못하고 <미디어스>의 미래는 없다. 서둘러 정리에 나서라. 동시에 대중음악이나 스포츠 등 대중문화의 또 다른 분야를 맡을 필자도 보강해야 한다. <프레시안> 어퍼컷의 명수 정희준 교수를 고정필진으로 스카우트하거나, 이동연 같은 대중음악 전문가를 끌어들이는 것은 어떠할까?

쓰겠다고 약속했으면 열심히 쓰고, 그럴 수 없다면 과감히 지면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시사 부문의 경우 특히 그러해 보인다. 세 분이 계시나, 유감스럽게도 한 분의 글은 4월에 끝났고, 또 다른 칼럼은 5월로서 중단된 상태다. ‘낮은 목소리’ 하나로는 역부족. 나는 오래전부터 <미디어스>가 매체 전문지로부터 점차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사회와 매체의 유관성, 언론과 정치의 관련성을 고려할 때, <미디어스>가 시사·정치 분야를 깊이 있고 특성 있게 커버하는 것은 당장의 시급한 일이다. 이런 현실의 흐름에 걸맞는 자원의 배정이 필요해 보인다. 빠른 조정을 기대한다.

물론 완군처럼 순발력 있게 끼어들어 재치있는 솜씨로 클릭·조회 수를 올려놓는 선수들이 있어 다행이다. 김한빛의 말랑말랑한 기사들은 블로거 자그니의 문화정치적 시비, 새로 등장한 홍성일의 유려한 문장 및 도발적 착상과 어울려 다양한 무늬를 꾸며내는 데 일조한다. 언론연대 김영호 대표의 육중한 기고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 경제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미디어스>의 외연을 확대하는 데 큰 미덕을 발휘한다. 이 모든 자원을 보다 생산적인 방식으로 재배치함으로써 대중적 교통가능성, 사회적 소통능력의 도약을 꿈꾸자는 말이다. 필요하다면, <프레시안>처럼 원고료 없이 기꺼이 쓸 일꾼들을 모으면 되지 않는가?

찾아보면 선수는 세고 셀 것. 자 이제부터는 내부의 이야기를 해보자. 솔직히 쉽지 않다. 그래도 지난 1년을 되짚어, 출발 때부터 생각해 본다. 아마추어 티가 풀풀 나는, 솔직히 어설픈 인터넷신문으로 시작했다. 유력 언론단체가 내놓은 성명서를 그대로 요약 정리하기에 바쁜 기자들. 심층 취재, 분석·비평과는 거리가 참 멀어 보이는 불량 기사들.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몰라도, 엄청난 사건들이 매일 매일 터지는 데도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하는 후진 지면. 21세기의 속도감으로부터 한참 유리된 20세기형 슬로비디오. 말 그대로 별반 영양가 없는 전반전이었다. 내부의 균열과 분란, 불안이 고스란히 지면으로 외화되었다고나 할까?

내부적 위기감, 외부적 불안감은 다행히도 5월부터 폭발한 촛불정국을 통해 조금씩 해소되는 것 같았다. 미디어운동진영이 광장 속으로 깊숙이 빨려들고, 공영방송 및 언론자유를 둘러싼 첨예한 긴장·적대관계가 형성되면서 발생된 기회였다. 언론·방송·매체 관련 논란이 연속해 터지면서 그만큼 전달할 기사거리들이 많이 생겨났다. 대중의 관심도 고양되었다. <미디어스>의 존재감은 바로 이 현실의 위기, 기회의 현실을 놓치지 않고 포착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었다. 운동에 운동으로 대처함으로써 현장으로부터 신뢰감을 획득하고, 권력으로부터 존재감을 확인하며, 무엇보다 대중의 인지도를 높인 게 큰 소득이었다.

활력이 붙고 탄력이 생긴 것 같았다. 후반전의 변화된 모습이다. 성명서 카피, 토론회 녹취 기사의 자리에 실속있는 취재 기사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불안해 보였던(?) 수습기자들께서도 이제는 예리한 비판, 예민한 반성이 담긴 기자수첩 등의 글을 통해 독자와 편하게 만난다. 신문 전반적으로 자신감이 생긴 느낌이다. 안정감? 사무실을 나와, 기자회견장이나 세미나장을 탈피해, 기자들이 직접 발로 뛴 결과일까? 생동감 있게 부정을 고발하는, 기동력 있게 권력에 맞서는 결기도 눈에 자주 띈다. 요즘 말로 ‘님 좀 짱인 듯!’이라고 말해 주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갈 길이 멀다. 우선 사태를 심층적으로 파고들고 체계적으로 조망하는 분석 기사들이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늘 뒤쫒기에 바쁘지, 현실을 앞지르지 못한다. 순간순간의 현상 리포트만 많지, 원인과 결과에 관한 래디컬한 저널리즘이 태부족하다. 가령 영국과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신자유주의 자본국가/치안국가의 지난 20년이 공영방송, 언론자유, 민주주의에 어떤 비참의 효과를 가져왔는지, <미디어스>는 당장 시리즈물을 내놓아야 한다. <미디어스>에게도 세계는 곧 한국이라는 것인가? 전지구적 제국의 시대, 협소한 민족/국가의 울타리는 서둘러 무너뜨릴 것.

역사를 거스르고, 사회 안팎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과의 생생한 인터뷰 시간도 더 많이 가져야 한다. 강의석을 만나야 하고, YTN 사측의 잔혹하고 비열한 테러에 분개하는 시민의 목소리를 청취해야 한다. KBS 사장·이사장에게 인터뷰 요구를 해야 하며, 최시중 위원장의 동정을 졸졸 쫓아야 한다. KBS 노조선거의 분위기를 알뜰하게 소개하고, 김보슬 피디를 비롯한 MBC 내부의 동정을 차분하게 소개해 줘야 한다. <미디어스> 지면이 비평가들 간 치열한 논쟁의 장, 대중들 사이 진지한 토론의 공간이 되도록 하는 방법론을 고안해야 한다. 촛불 때 차용된 비디오, 1인 저널리즘이라는 중요한 형식을 이제는 왜 안 쓰는가? 대중의 감각, 대중의 코드, 대중의 원망을 늘 염두에 두시라.

그렇게 효과적으로 권력과 부딪치고 능동적으로 현장과 결속하며, 대중과 직접적으로 교통하는 <미디어스>로 진화하는 것 외에 살 길이 없다. 공감·공분·공론의 권력 모니터가 되는 것이다. 차이 나는 생각들의 놀이터, 자유로운 언론의 해방공간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여전히 대중들의 공통된 의식과 공통된 감각, 공통된 이해관계를 찾아내는, 말 그대로의 대중매체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 주요기관으로 위치 매김 하는 것이다. 공포의 권력을 긴장시키는 용감한 언론기계가 되고, 비평의 분자들에게 즐거운 놀이시설이 되는 것이며, 저널리즘에 목말라 있는 이 땅의 호모사케르들에게 필수적 교통수단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권력의 탄압, 자본의 기피가 뻔하게 예견된다. 색깔 씌우기, 왕따 시키기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2008년 10월 <미디어스>는 한국사회의 다른 제 영역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야만이 강제하는 섬뜩한 조건, 공포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 주범인 자본/정치권력에 대항함으로써 위기의 대중/사회를 보호하고, 그럼으로써 거꾸로 후자로부터 보호받는 것 외에 위험 극복·위기 탈출의 길은 없다는 것. 그게 <미디어스>와 자유언론, 민주주의, 한국사회가 공통적으로 처한 운명이자 더불어 모색해야 할 살 길이다.

시대에 앞서 <미디어스>를 띄운 발상은 탁월했다. 모든 가용자원이 고갈되는 현실을 고려할 때, 선점·선방·선공하는 우리 실력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1년이 아닌, 앞으로의 1년, 5년, 20년이다. 공적공간 위축, 자유공간 폐쇄, 표현능력 차단의 암울한 시대에 <미디어스>는 어떻게 언론해방·권력통제·사회구제의 역사적 책무를 수행해 갈 것인가? 어떻게 두더지처럼 어둠 속 저항선을 개설하고 접점을 만들어내는, 진보적 가능성의 잠복장소로 자신을 구축할 것인가? 힘든 고행, 어려운 시련, 중대한 시험이 기다리기에, 모두에게 ‘앗싸, 파이팅!’입니다요. 나는 더 많이 반성하고. 낑낑.

지금처럼 ‘비평의 무기’를 예리하게 연마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까? 벼락같은 이성의 도끼질, 결을 거스른 감수성의 대패질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래디컬’한 저널리스트로의 변신. 자본권력과 국가권력, 매체권력, 지식권력이 나의 상대다. 가끔 참패당하고 때로는 붙잡고 버티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왼손펀치 한방을 가진 선수로 남고 싶다. 인민은 착하고 또 무섭다. 이들과 함께하는 비평 말고 그 어떤 것이 후기근대, 후기자본의 불모지대를 넘어갈 수 있겠나? 목청 낮춘 채 예의주시하는 보통사람들의 삶, 이들의 언어에 스며들어 비평의 유격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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