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비선’ 의혹을 받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전 비서실장 정윤회 씨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교체설을 퍼뜨린 당사자라는 <세계일보>의 1면 보도에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다. 청와대는 한 행정관이 개인적 차원에서 증권가 정보지에 떠도는 풍문을 모아 작성한 문건을 <세계일보>가 보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과거 정윤회 씨를 둘러싼 권력 내 암투설이 끊임없이 제기된 바 있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큰 파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계일보> 보도 파장...정윤회 '문고리 3인방'과 김기춘 교체 시도?

<세계일보>는 28일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내부에서 작성한 ‘감찰보고서’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정윤회 씨가 이재만, 안봉근, 정호성 비서관 등 소위 ‘문고리 권력 3인방’과 주기적으로 만나 청와대 및 정부 내의 현안을 보고받고 인사 등에 대한 지시를 했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이 보고서에서 정윤회 씨와 그 측근들은 ‘십상시’로 지칭되고 있다. 특히 이 감찰보고서에 의하면 정윤회 씨는 김기춘 비서실장 교체를 목적으로 증권가 정보지에 ‘교체임박설’, ‘건강이상설’ 등을 퍼트렸다고 한다.

정윤회 씨가 커튼 뒤에서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야당 일각에서는 ‘만만회’(이재만-박지만-정윤회)라는 말까지 만들어 이러한 의혹을 전면에 제기했다. 하지만 그간 정윤회 씨와 측근들은 이러한 의혹이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그러나 <세계일보>의 보도는 그간의 의혹에 상당한 근거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세계일보>에 따르면 이 감찰보고서는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보고됐지만 이후 석연치않은 이유로 보고서를 작성한 경찰 출신 행정관은 원대복귀됐고 공직기강비서관실의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보도에 따르면 청와대는 정윤회 씨에 대한 감찰을 시도할 때마다 인사이동이 시행되는 등의 사태에 휘말려왔다.

▲ 시계보는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 (연합뉴스)

정윤회는 왜 김기춘을 교체하려 했던 것인가?

세간의 관심은 정윤회 씨가 김기춘 비서실장의 교체를 시도한 배경에도 쏠리고 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야권의 비판을 한 몸에 받으며 시기마다 반복해서 교체설에 시달려 왔다. ‘비선’ 의혹을 받고 있는 정윤회 씨가 김기춘 비서실장의 교체를 시도한 것에는 야당의 공세 이외에도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추측 역시 제기되고 있다.

가장 먼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정윤회 씨와 박근혜 대통령의 친동생인 박지만 EG회장의 갈등설이다. 올해 초 정치권에는 정윤회 씨의 측근이 박지만 회장을 미행하다가 발각됐다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는 지난 3월 <시사저널>에 의해 기사화 됐다. 당시 <시사저널>은 박지만 회장이 지난해 12월 한 달 전부터 자신을 미행하던 오토바이 기사로부터 정윤회씨의 지시로 미행하게 됐다는 진술을 받아냈다고 보도했다. <시사저널>에 따르면 박지만 회장은 당시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냈다. 또, 박지만 회장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도 자신이 미행당한 사실을 알렸다. 이에 따라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이 사건을 내사했지만 내사 도중 담당자에 대한 인사발령이 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내사가 무력화된 것이다. 이러한 인사발령을 요구한 것은 <시사저널>의 표현에 따르면 ‘대통령 측근’이다.

재미있게 볼만한 건 이 과정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의 태도다. <시사저널>에 따르면 김기춘 비서실장은 자신에 대한 미행에 항의하는 박지만 회장에게 ‘그럴리가 없다’는 취지의 해명을 하는가 하면 ‘박지만 미행 사건’의 내사 담당자에 대한 인사발령 지시를 내렸는지 여부를 묻는 민정수석실 관계자의 질의에도 ‘그런 지시를 한 바 없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시사저널>은 인사발령을 종용한 ‘대통령 측근’이 정윤회 씨의 측근이라는 취지로 보도했는데, 이와 같은 해석을 따르면 결국 김기춘 비서실장은 이 사건에서 나름대로 중립을 지킨 셈이다.

박지만 라인의 반격...'복수' 시도 했다 '제압' 당했나?

문제는 이후의 상황이다. <세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정윤회 씨에 대한 감찰이 시작된 것은 올해 1월로 조응천 당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이를 지시했다. 시기를 보면 박지만 회장에 대한 미행 사건이 벌어진 바로 직후다. 조응천 당시 비서관은 ‘박지만 라인’으로 분류된다. 초임 검사 시절 박지만 회장의 마약 투약 혐의에 대해 수사를 하다가 서로 인연을 맺게 됐으며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주요 사안을 직접 보고할 정도였다고도 한다. 즉, 모양새로 보자면 박지만 회장의 측근이 정윤회 씨에 대한 감찰을 진두지휘한 것이나 다름없다. 일종의 ‘복수’로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감찰의 결과는 조응천 비서관이 지난 4월 청와대에 사표를 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조응천 비서관의 사퇴는 지난 10월 박지만 회장의 육군사관학교 시절 ‘절친’으로 알려진 이재수 국군 기무사령관이 교체되면서 ‘박지만 라인이 모두 밀려나고 있다’는 식으로 정치권에 회자됐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와 같은 상황을 보도하면서 “정권의 일부 핵심 비선 인사들이 친인척 관리를 명분으로 자신들에 대한 잠재적인 반대 세력을 밀어내려는 분위기가 있다”는 여권 관계자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 지난 10월 8일자 조선일보 기사.

박지만 vs 정윤회 권력 암투, 김기춘은 중립자였나?

결국, 추측하자면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회장과 ‘문고리 권력 3인방’을 꽉 잡고 있는 정윤회 씨의 암투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결론도 가능하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이 과정에서 나름의 중립(?)을 지킨 셈인데, 정윤회 씨가 김기춘 비서실장을 교체하려고 시도했다면 바로 이를 빌미로 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정치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기춘 비서실장은 소위 ‘문고리 권력 3인방’들의 독특한 위상을 그다지 문제삼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박지만 회장의 견제 명분으로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를 내세울 수밖에 없는 정윤회 씨 측에서는 박지만 회장에 대해 사실상 무력한 김기춘 비서실장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해석이다.

물론 박지만 회장이나 정윤회 씨나 청와대를 활용해 서로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박지만 회장은 대통령의 친인척으로 특별관리 대상이다. 역대 정권에서 친인척이나 자녀들이 전횡을 일삼아 비극적 말로를 맞은 대통령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박근혜 정권으로서도 박지만 회장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정윤회 씨는 공식적으로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의 의견이 어떤 방식으로든 청와대의 공식 업무에 반영되는 것은 부적절하다. 아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청와대를 이용해 서로 복수를 주고 받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일정한 용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기왕지사 이렇게 됐으니 박근혜 대통령은 <세계일보>에 대한 법적 대응을 운운할 게 아니라 박지만 회장과 정윤회 씨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암투에 속수무책인 김기춘 비서실장에 대한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에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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