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위기론은 언제나 ‘위기’를 과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기론 자체가 언제나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아닌 땐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순 없는 노릇이다. 지상파 방송이 위기다. 저널리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됐다는 말은 오래됐다. 시사프로그램의 예리함 역시 둔탁해졌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이유라도 분명하다. 정권에 의한 순치, 낙하산 사장을 탓하면 된다.

하지만 콘텐츠에 이르면 좀 얘기가 달라진다. 지상파 경영진들은 “한류 콘텐츠를 지상파가 선도”하고 있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제작비가 턱없이 부족”할 뿐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지상파 방송의 콘텐츠들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잃어가고 있다. 의미성과 화제성 모두 부진하고, 과거와 같은 파괴력은 이제 그들 스스로도 기대하지 않는 상황이다. 타 장르에 대한 우월성 역시 상실해가고 있다.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 작가가 “지상파는 ‘러브라인 안 나오면 안 된다’라고 해 케이블로 갔다”고 말하는 것은 단적인 예이다.

공공플랫폼의 역할은 방기하면서 PP화 되고 있지만, 여전히 ‘슈퍼갑’ 시절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지상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미디어스>가 4회에 걸쳐 짚어본다.

① 분당에 사는 30대 주부는 왜 지상파 방송을 보지 않을까?(▷링크)
② '미생'이 지상파 드라마였더라도, 임시완이 주연이었을까?(▷링크)
③ “지상파 간부 PD들의 권위의식과 낡은 패러다임이 문제다”


tvN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 작가가 “지상파는 ‘러브라인 안 나오면 안 된다’라고 말해 케이블과 계약했다”고 말했다. 드라마 작가들 사이에서 크게 화제가 됐다. 복수의 드라마 작가들은 이제 더 이상 지상파 편성만 고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상파 드라마와 예능에 대한 진단 기사를 쓰며 취재한 드라마 작가 B씨는 “인터뷰를 하겠다고 한 이유가 제가 바로 지금 그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B씨는 자신이 쓴 대본을 놓고 지상파와 케이블 양쪽에서 ‘콜’을 받았다. 하지만 조금의 망설임 없이 케이블을 선택했다고 했다. 이유가 궁금했다. 여전히 지상파 드라마를 하는 것이 개인의 필모그래피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상파와 작업하는 게 더 이득이 아니냐’는 물음에 작가 B씨는 “작가로서 뜨는 것만 생각한다면, 지상파가 더 낫다”면서도 “그러나 나는 작품·예술을 하고 싶었다. 작품의 퀄리티를 위해서는 케이블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간명하게 답했다. B씨는 “현재 지상파에는 좋은 대본이 없다. (시청률을 떠나) 매력 있는 작품이 없는 것”이라며 “반면, 케이블과 종편은 일단 시청률에서 자유로우니 다양한 장르를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작품을 쓸 때에도 완성도를 높이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tvN '미생'과 '삼시세끼' 포스터

작가 B씨는 지상파 드라마의 문제를 “상품을 만드려는 태도”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상파 드라마는 찍어내는 상품과 같다”며 “철저히 팔릴 수 있는 상품만 만든다. 그러다보니 아이돌이 나와야 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작가들이 지상파와 케이블에서 콜이 왔을 때 케이블을 선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넷과 SNS의 발달과 미드 침투로 인해 시청자들의 수준이 높아진 상황에서 지상파가 ‘팔리는 상품’을 고집한다면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상파가 아닌 케이블에서 웰메이드라고 평가받는 드라마·예능 프로그램이 꾸준히 나오는 이유에 대해 작가 B씨는 ‘지상파 방송프로그램과의 차별화’에서 답을 찾았다. OCN의 경우, <신의퀴즈>와 <TEN>, <처용>, <리셋>, <나쁜녀석들>, <닥터 프로스트> 등 꾸준한 범죄수사물을 편성하면서 장르물의 경우 완성도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가 B씨는 “케이블과 종편사업자들은 작품을 대하는 태도부터 다르다”며 “어느 덧 ‘지상파보다 작품력 있는 것을 편성한다’는 자존심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CJ채널도 그렇고 JTBC의 경우도 지상파에서 옮겨온 PD들이 많다. 그들은 지상파에서 나올 때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나온 것”이라면서 “현재 케이블과 종편에는 그 같은 연출가와 기획자들이 많기 때문에 작품력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앞으로도 더 강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아래는 작가 B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지상파, 케이블·종편 무시하는데 패러다임은 바뀌고 있다”

- tvN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 작가가 “지상파는 ‘러브라인 안 나오면 안 된다’라고 말해 케이블과 계약했다”고 말했다. 드라마 작가들 역시 ‘굳이 지상파를 선택할 이유는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많이 바뀐 것으로 들었다.

“인터뷰를 하겠다고 한 이유가 제가 지금 그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상파의 한 채널과 케이블·종편(이하 PP)에서 콜이 왔는데 PP를 선택했다. 그 선택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PP는 편성에 있어서 작가의 권한이 크다. 지상파는 그에 비해 갑질이 심하다. TOP 10에 드는 작가가 아니면 지상파와 일하기 힘들다. 만일, 3월 편성에 계약을 하더라도 그것은 확정된 게 아니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둘째, 제작 자율성의 문제이다. 지금 지상파 미니드라마는 굉장히 불안한 상황이다. 시청률이 안 나온다. 그런 상황에서 지상파는 철저한 상업논리로 작품을 배치하다보니 아이돌은 무조건 나와야 하고 러브라인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을 대놓고 요구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작가들의 자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웹툰 <미생> 윤태호 작가처럼 급이 있는 작가도 지상파로 가면 그런 수모(작품을 수정해 러브라인을 넣는 등)를 겪을 수밖에 없다. 신인작가들에게는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는가. 지상파의 국장급 이하 PD들은 굉장한 권위의식을 가지고 여전히 자신들이 갑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케이블이나 종편을 무시하는데 패러다임이 얼마나 바뀌었고 바뀌고 있는지 그들만 모르는 것 같다”

-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부분은 무엇을 뜻하나.

“지금은 인터넷이나 SNS 등의 발달과 미드의 침투로 인해 시청자 수준이 높아졌다. 주중에는 젊은 사람들은 드라마를 안 본다. 실시간 방송을 볼 필요가 없다. VOD서비스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다. 여론을 형성하고 이끄는 다수는 지상파 드라마보다는 케이블 드라마가 더 낫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시청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tvN <삼시세끼> 시청률이 8%까지 나왔다. 반면, 지상파 드라마나 예능이 4%대로 나오는 경우들이 발생하고 있다. 러브라인도 없고 대중적이지도 않은 케이블 드라마를 시청자들이 찾는 것이다. 그만큼 시청자들 수준이 높아졌다. 지상파가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스스로 바꾸지 않으면 말이다”

- 드라마 작가로서 지상파와 작품을 하는 것이 그래도 이익이지 않나.

“맞다. 작가로서 뜨기에는 지상파가 더 낫다. 그리고 케이블PP는 아직 좋은 배우를 선택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드라마 패러다임이 이동하고 있다. 앞으로는 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케이블로 가는 작가들의 경우 예술을 하고 싶어서라고 볼 수 있다. 드라마를 제 시간에 실시간으로 보는 시청자는 40~50대 중년의 아줌마들이다. 그런 상황에서 지상파가 드라마를 만들 때 철저한 상업 논리로 다가가니 문제가 발생한다. 아이돌이 무조건 나와야 하고 러브라인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을 작가들에게 대놓고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들의 자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작가로서 내 작품이 좀 더 자유롭게 글을 쓸 공간이고 싶은데 그것이 지상파에서는 잘 안 된다”

- 자연스럽게 지상파 드라마의 문제로 넘어가는 것 같다. 지상파 드라마 무엇이 문제라고 보나?

“팔기 위한 드라마를 만들다보니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지상파에 좋은 대본이 없다. 작가 이름 하나 보고 편성을 하다 보니 대본 수준이 낮아진다. 그렇게 매력 없는 작품들이 지상파에 많아졌다. 특히, 아이돌을 써야 하는 문제는 심각하다. 20대 정통 연기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지상파는 한류, 장사를 위해 아이돌을 집어넣는데 좋은 선택이 아니다.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드라마 tvN <미생>이나 OCN <나쁜녀석들>, JTBC <유나의 거리> 어디에도 아이돌은 없다. 물론, <미생>에 임시완이 주인공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아이돌이기 때문에 뽑힌 것은 아니다”

▲ JTBC에서 웰메이드라는 평가를 받으며 종영한 '유나의 거리'


“지상파, 드라마시장에서 좌표 잃어…<미생> 성공했으니 오피스 활극 판 칠 것”

- 그런 방송환경은 지상파나 케이블 모두에게 같은 조건이다. 그런데, 케이블PP의 드라마가 지상파와는 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는 뭔가.

“일단, PP는 시청률에서 자유로우니 다양한 장르를 할 수 있다. 특히, 능력 있는 연출자들도 케이블로 많이 이동한 상황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케이블PP는 (지상파와 차별성을 보이기 위해)오히려 좋은 드라마를 선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작가로서 표현의 자유 폭도 넓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필요한 장면들이 있는데 이 부분에 케이블PP가 지상파 보다 자유롭다. 담배 피우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현실에서는 담배를 피우는데 TV에서는 피우면 안 된다. 그런데 케이블은 담배를 입에 무는 장면까지는 가능하다. 이 밖에도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표현들이 지상파에서는 심의에 걸리는 부분들이 많다. 또, 소재에 있어서도 지상파는 제약이 많다. 소매치기를 소재로 한 JTBC <유나의 거리>라는 명작을 지상파에서 편성할 수 있었겠나. 불가능했을 것이다. 최근 주변에 JTBC와 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작가들도 많아졌다. 지상파 드라마는 이제 드라마시장에서 좌표를 잃었다”

- 그렇다면 지상파가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할까?

“지상파는 태생적인 문제로 발전할 수가 없다. 윤태호 작가에 요구했던 ‘러브라인’ 등의 통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청자들의 선택을 받는 전략을 바꿔야 한다. JTBC는 과도기 상황이지만 tvN은 실험적이고 신선한 드라마라는 채널로 이미 자리잡았다. 물론, 지상파에서도 현재 바뀌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SBS <모던파머>의 경우 새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이제 케이블 드라마가 지상파를 견인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tvN에서 <미생>이 큰 성공을 거두었으니 이제 지상파에서 오피스 활극이 또 판을 칠 것이다. 두고 봐라. 또한 지상파들 역시 작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공모전을 많이 하는 등 스타작가 시스템을 바꾸려는 노력 중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화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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