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위기론은 언제나 ‘위기’를 과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기론 자체가 언제나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아닌 땐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순 없는 노릇이다. 지상파 방송이 위기다. 저널리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됐다는 말은 오래됐다. 시사프로그램의 예리함 역시 둔탁해졌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이유라도 분명하다. 정권에 의한 순치, 낙하산 사장을 탓하면 된다.

하지만 콘텐츠에 이르면 좀 얘기가 달라진다. 지상파 경영진들은 “한류 콘텐츠를 지상파가 선도”하고 있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제작비가 턱없이 부족”할 뿐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지상파 방송의 콘텐츠들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잃어가고 있다. 의미성과 화제성 모두 부진하고, 과거와 같은 파괴력은 이제 그들 스스로도 기대하지 않는 상황이다. 타 장르에 대한 우월성 역시 상실해가고 있다.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 작가가 “지상파는 ‘러브라인 안 나오면 안 된다’라고 해 케이블로 갔다”고 말하는 것은 단적인 예이다.

공공플랫폼의 역할은 방기하면서 PP화 되고 있지만, 여전히 ‘슈퍼갑’ 시절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지상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미디어스>가 4회에 걸쳐 짚어본다.

① 분당에 사는 30대 주부는 왜 지상파 방송을 보지 않을까?(▷링크)
② '미생'이 지상파 드라마였더라도, 임시완이 주연이었을까?


지상파 방송사들이 사활을 걸고 편성한 드라마들이 번번이 시청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종영되고 있다. SBS <비밀의 문>은 배우 한석규의 드라마 복귀작이자 군 제대한 이제훈의 연기 복귀작이라는 점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역사왜곡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시청률은 곤두박질쳤고 현재 5%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SBS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역시 비(정지훈)의 드라마 복귀작이었으나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최지우와 권상우의 재조합으로 화제를 모았던 <유혹>역시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에 모았던 화제를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이렇듯 지상파 드라마의 고전은 식상함에서 비롯된다. 드라마 작가들 사이에서 조차 ‘굳이 지상파가 아니어도 된다’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을 정도다. 최근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 양 측에서 콜을 받았다는 드라마 작가 B씨는 망설임 없이 케이블을 선택했다. B씨는 ‘케이블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작품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작품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서는 케이블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케이블 드라마가 지상파 드라마에 비해 ‘고품질’이라는 그의 말은 신선하다. 그는 “지상파는 철저한 상업논리로 팔기 위한 상품을 만들다보니 아이돌은 무조건 나와야 하고 러브라인이 들어가야 한다”며 “작가들에게도 그것을 대놓고 요구한다. 윤태호 작가처럼 급이 있는 작가조차 지상파로 가면 작품을 훼손하는 러브라인 수모를 겪지 않느냐”고 말했다.

▲ KBS <나는 남자다>는 국민MC 유재석을 기용했지만, '진부하다'는 평가를 넘어서지 못하며 조기종영이 결정됐다.

지상파의 예능…새로운 건 또 무엇?

예능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MBC <무한도전>은 최근 400회를 맞았다. <무한도전>의 콘텐츠 파워는 여전하다. 그런데 그게 역설적이다. <무한도전>의 콘텐츠 파워는 ‘새로움’에 있다. ‘가요제’나 ‘달력’ 등 장기 프로젝트를 비롯해 계속 새로운 아이템으로 승부를 하고 있다. 익숙한 멤버들이 등장하지만 그래서 <무한도전>은 여전히 “젊은 프로그램”으로 통한다. 그러나 <무한도전>을 제외하면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 가운데 JTBC <비정상회담>이나 tvN <삼시세끼>만큼의 화제성을 불러일으키는 예능은 현재는 별로 없다.

KBS <나는 남자다>는 지상파 예능이 갖는 한계를 그대로 보여줬다. 국민MC 유재석을 내세운 프로그램으로 파일럿 프로그램을 거쳐 정규 편성됐지만, 시청률 3~4%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부진을 면치 못했다. 결국, KBS는 <나는 남자다>를 다음 달 19일 종영한다. 기존의 예능 문법에서 보자면 ‘유재석의 새로운 프로그램’이라는 메리트만으로 망할 수도 망해서도 안 되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식상하다’는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능 문외한에 가까운 이서진을 전면에 내세운 tvN <삼시세끼>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결과다. SBS <매직아이> 또한 종영했다. 당초 ‘착한 예능’ <심장이 뛴다> 자리를 꿰찼던 프로그램으로 가수 이효리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2012년 배우 고현정의 인기에 기대 SBS에서 편성됐던 <Go Show>의 종영은 “더 이상 연예인들의 신변잡기 ‘잡담’은 시청자에게 아무런 매력을 주지 못한다”는 교훈을 주었지만, 지상파 예능은 똑같은 실책을 반복하고 있다.

지상파의 다른 예능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다. 지상파의 주중 예능 라인업은 다양하고 화려하다. KBS는 <위기탈출 넘버원>,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십니까?>, <1대100>, <우리동네 예체능>, <가족의 품격-풀하우스>, <비타민>, <해피투게더>, <뮤직뱅크>,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MBC는 <황금어장-라디오스타>, <헬로! 이방인>, <띠동갑과외하기>, <나혼자산다>를 편성하고 있다. SBS 또한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룸메이트 시즌2>, <에코빌리지 즐거운가>, <백년손님-자기야>, <웃음을 찾는 사람들>, <정글의 법칙>을 편성중이다. 그러나 여느 프로그램들도 특별한 시청자의 관심을 끄는 프로그램은 없다. 오히려 MBC <헬로! 이방인>은 JTBC <비정상회담>의 인기에 편승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SBS <룸메이트> 역시 올리브채널 <셰어하우스>의 포맷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지상파의 주말예능은 시청률에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고 있지만 그 역시 수년 째 “무난하게 나눠 먹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벌써 수년째 KBS <해피선데이>는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1박2일’을, MBC <일밤>은 ‘아빠!어디가?’, ‘진짜사나이’를, SBS <일요일이 좋다>는 ‘K팝스타’, ‘런닝맨’을 각각 편성하고 있다. KBS는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배우 송일국의 삼둥이가 등장하면서 안정적인 고정층을 확보했고, ‘1박2일’도 다시 재밌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왜곡 논란을 빚은 ‘진짜사나이’ 또한 평균적인 시청률은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 프로그램이 실시간 기사화되는 등 이슈를 불러일으켰던 적은 1박2일에 배우 조인성이 등장했던 때 정도 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지상파의 고민은 ‘계륵’과도 같은 신세로 전락한 장수 예능 프로그램이다. 화제성은 없지만 시청률이 10%대로 고만고만한 예능 프로그램이기에 없앨 수도 또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상황이 오래도록 이어지며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프로그램을 바꾸면 제작비는 더 들어가지만 시청률이 떨어진다면 그야말로 낭패가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엇비슷한 시청률 나눠먹기를 하고 있단 지적이다.

▲ <미생>이 지상파 방송에서 제작됐다면, 임시완이 주연을 맡을 수 있었을까. 방송 관계자들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류 스타가 필요하고, 소속사 끼워 팔기가 있어야 하며, 러브라인도 감안해야한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란 얘기다.

시청패러다임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지상파의 진부함, 왜?

하지만 이 나눠먹기에는 간과되는 부분이 있다.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률은 여전히 광고를 판매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로 작용하지만, 100% 그대로 적용되는 시기가 지났다는 점이다. 이제는 ‘시청률’보다는 ‘화제성’이 더 중요한 때이다. 화제성 면에서 지상파 방송프로그램이 케이블PP에 뒤처지는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광고 집행의 우선순위가 바뀔 수밖에 없다. 지상파의 실적 부진은 어쩌면 그 안락한 나눠먹기의 습관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한 방송 작가는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졌고 시청 패러다임이 많이 바뀌었지만 지상파가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구매력을 가진 소비층이 거실TV를 통해 방송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는 상황에서 지상파 방송이 여전히 거실TV를 대상으로 하고 있단 얘기다.

시청환경의 변화로 시청자들이 더 이상 지상파 채널만 고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상파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지상파와 케이블이 명확히 나뉘던 시절에 머물러있단 얘기다. 실제, 거실TV를 통한 방송프로그램 시청은 크게 줄어들었다. 모바일과 PC를 통해 TV를 시청하는 것에 익숙해진 시대다. VOD를 통한 다시보기도 급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파 방송사업자들은 여전히 ‘시청률’과 ‘한류’라는 낡은 가치만 읊조린다. 한 지상파 드라마 PD는 “지상파들이 올드한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20~30대는 TV를 외면하지만 40~50대 주부들을 공략하면 고정 시청률을 받을 수 있다.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당장의 경쟁력이 중요하지 채널 이미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지상파의 현재 상황은 “집밖의 산토끼를 잡기보다는 집토끼를 지키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한류’는 지상파의 이 고정됨을 다르게 설명하는 ‘알리바이’다. 낡은 드마라일지 모르지만 지상파는 ‘한류’를 선도하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역시 또 다른 부작용으로 등장한다. 지상파가 드라마의 중요한 역할을 지닌 주조연급에 아이돌을 기용하는 이유는 방송콘텐츠를 해외에 팔기 위해서다. 수출이 용이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력이 검증되지 않은 아이돌을 섭외하면서 ‘발연기’ 논란과 함께 드라마의 질은 점점 떨어진다. 악화가 양화를 밀어내는 제작 방식이다. 그래서 지상파드라마는 한류 스타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최지우·권상우 주연의 SBS <유혹>과 비·크리스탈 주연의 SBS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장근석·아이유 주연의 KBS <예쁜남자> 등은 한류를 위해 만들어진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전성’이 최우선 가치 된 지상파 프로그램들

지상파 프로그램의 문제는 이처럼 ‘안전성’을 최우선 가치로 추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콘텐츠 판매와 시청률에서 지나친 안전성을 추구하다보니 신선함이 떨어진다. 방송 작가 A씨는 “지상파 드라마와 예능에 나오는 인물들 구조적으로 식상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다. 드라마 작가 D씨는 “tvN <미생>을 지상파에서 제작했다면 지금의 섭외는 불가능했다”고 단언한다. tvN <미생>이 지상파에서 편성됐다면 싱크로율 100%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김동식 대리와 한석률 역에 김대명 씨와 변요한 씨가 섭외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 장그래 역의 임시완 역시 지상파에서는 주연급으로 통하는 인물은 아니다. 지상파드라마의 경우 같은 소속사 배우 끼어 넣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도 하다.

방송 작가 B씨는 “케이블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지상파와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지상파를 따라가면 이길 수 없으니 어차피 경쟁적 상황이라면 그들과 차별적인 콘텐츠를 선택한다”며 “그러다보니 더 작품력 있는 대본을 우선순위로 편성할 수 있다”고 케이블드라마의 성공 배경을 분석했다. 그는 “시청자들의 선택을 받는 전략을 바꾼 것”이라면서 “tvN이 실험적이고 신선한 드라마로 먼저 자리를 잡았다. 평론가들 역시 이제 케이블 드라마에 대한 (긍정적)평가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상황이라 이를 지상파가 역전시키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상파와 경쟁하려면 오히려 더 자극적인 것을 선택해야하는 게 아니냐’라는 물음에 B씨는 “(지상파가 아닌 굳이)케이블 드라마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미 ‘지상파와는 다른 웰메이드 드라마’를 요구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물론, ‘지상파’라서 갖는 구조적인 제약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은 지상파와 케이블 드라마와 예능 모두 적용 대상이다. 하지만 적용은 달리한다. 케이블은 유료방송이라는 점에서 선정·폭력적 장면에서 좀 더 자유롭다. tvN <꽃보다 할배>에서 고스톱을 치고 술을 마시는 장면은 그대로 노출됐다. 만일, 지상파였으면 100% 문제가 됐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현재 방영금지이다. 그러나 tvN <미생>에서 담배를 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작가 B씨는 지상파와 케이블의 표현 가능범위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범죄수사극으로 주목받고 있는 OCN <나쁜녀석들>, <TEN>, <신의퀴즈>, <처용>, <리셋> 등의 폭력적인 장면들 또한 지상파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범위이다. 또한 지상파는 편성 측면에서 ‘조기종영’, ‘폐지’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실험’편성 또한 쉽지 않은 이유다.

한정된 ‘제작비’에서도 지상파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측면도 있다. tvN <미생>이 케이블에 편성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지상파 한 PD는 다른 이유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는 “CJ에서 지상파의 2배를 불렀다고 들었다”면서 “(러브라인 등 문제도 있겠으나)그 가격은 지상파로서는 가능하지 않은 금액”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케이블에서 볼만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채널은 tvN이나 OCN, JTBC로 그 뒤에는 CJ와 <중앙일보>라는 대기업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 지상파 드라마의 한 PD는 “방송시장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지상파가 위축되다보니 연출자들 역시 (실험적인 드라마를 하기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며 “지상파라고 해서 tvN <미생>, OCN <나쁜녀석들> 같은 드라마 하고 싶지 않겠나”고 말하기도 했다.

지상파가 변화를 꾀하지 않는 건 아니다. 지상파 복수의 관계자들은 “지상파가 새로운 ‘작가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신선한 아이템을 선정하기 위함이라는 얘기다. 또한 SBS <모던파머> 또한 지상파의 변화시도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파의 변화 가능성’에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높았다. 이유는 한결 같다. 지상파방송사업자들이 여전히 “팔기 위한 상품”(한류스타/아이돌)을 버리지 못한다면 지상파의 고전은 계속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새로운 시청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 방송시장에서 지배자로 군림해온 지상파라고 하더라도 도태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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