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단두대’ 발언이 화제다. 연이은 과격 발언에 당황한 언론들의 모습이 재미있다. <조선일보>는 26일 지면에 <박 대통령 ‘섬뜩한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줘야>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했다. 이 사설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국무회의 자리에서 “규제들을 한꺼번에 단두대에 올려 처리하게 될 것”이라며 “규제 기요틴을 확대해서 규제 혁명을 이룰 것”이라고 발언한 데 대한 <조선일보>의 충언이 실려있다.

<조선일보>의 충심어린 조언의 내용은 이렇다.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2년 차인 올해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을 제시하며 규제 혁파를 내세워왔는데 아무래도 성과가 신통치 않다는 거다. 그러니 초초해진 박근혜 대통령은 규제를 ‘암 덩어리’에 비유하는가 하면 “쓸데없는 규제는 우리의 원수”라고 말하기도 하고 규제 개혁의 실무를 맡은 공무원들에게는 “한번 물면 살점이 완전히 뜯겨 나갈 때까지 놓지 않는 진돗개처럼 움직여야 한다”라고까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에 대해 “국정의 목표와 방법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강도와 속도조절 등이 능수능란하지 않고서는 성공한 정권으로 평가받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 정권도 이제 실적으로 평가받을 시기가 됐다”는 게 이 충정어린 사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 조선일보 26일자 사설.

집권 2년 차는 대통령의 힘이 가장 센 시기다. 1년 차의 ‘어리버리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으면서 권력 누수를 아직도 길게 남겨둔 집권 초반기이기 때문이다. 2년 차에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향후 정권에 대한 평가가 바뀔 수 있다. 때문에 박근혜 정권이 2년 차의 핵심 과제를 ‘규제 완화’로 잡은 것은 이들이 무엇을 위해 집권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은 지역구도와 이념적 지향으로 형성된 ‘콘크리트 지지층’에 중간층 일부의 지지가 더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중간층 일부의 지지를 이끌어 온 요인으로는 크게 네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박근혜 후보’라는 캐릭터 고유의 인간적 매력, 둘째는 ‘100% 대한민국’이라는 중도적 지향의 슬로건, 셋째는 ‘경제민주화’라는 야권 의제의 브랜드 선점, 넷째는 ‘생애주기별 맞춤형’이라는 복지제도에 대한 전향적 접근이다. 이 중 첫째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공약’과 관계가 있는데, 집권 2년차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는 주로 이러한 요인들의 영향력을 ‘선거용’으로 국한시키고 ‘보수본색’을 드러내는 데 치중해있는 것으로 보인다.

‘규제 완화’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히 ‘100% 대한민국’과 ‘경제민주화’라는 슬로건을 거스르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규제 중에는 한첨 이전의 시대에 만들어져 현대에 와서는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을 괴롭히는 쓸데없는 절차를 요구하는 것들도 물론 있지만 대개는 서로 다른 경제 주체들 간의 갈등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농민과 유해물질 배출 산업 종사자, 건물주와 세입자, 노동자와 자본가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재계가 기업의 활동에 방해가 되는 규제들을 ‘대못’이라 부르며 철천지 원수 대하듯 하는데, 그러한 ‘대못’들도 대부분은 기업의 활동으로부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어떤 다른 주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규제를 새로 만들거나 풀기 위해서는 이 경제주체들간의 관계에 그러한 조치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 면밀히 분석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해야 한다.

▲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현안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대한민국 권력의 꼭지점에 있는 대통령이 규제 완화에 대한 막말을 쏟아내면 면밀한 분석과 만반의 준비가 아닌 허겁지겁, 주먹구구, 엉망진창의 규제완화가 될 수 있다. 규제완화의 실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의 입장에서는 그 단두대 위에 과연 규제가 올라가게 될 지 ‘내 목’이 올라가게 될 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그간 과격한 발언을 쏟아 냈음에도 지금까지 초조해할 정도로 규제완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면 그만큼 그 규제들을 둘러싼 경제주체들 간의 갈등이 첨예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이 규제완화를 밀고 또 밀어 붙이는 이유는 앞뒤가 어떻든 무조건 규제완화의 필요성을 외치는 측의 말만 듣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소위 ‘규제완화 끝장토론’이라는 것도 진행해가며 자영업자 및 중소기업 대표들을 불러 그들의 민원을 청취하였는데, 예를 들면 ‘불안정 노동자 처우개선 끝장토론’은 왜 진행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불안정 노동자들을 잔뜩 모아 요구를 청취한다면 그들은 대부분 임금인상, 해고 요건 강화,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 축소 등의 다양한 주장을 꺼내놓을 것이다. ‘100% 대한민국’과 ‘경제민주화’의 비전에서는 이 모든 요구를 반영하는 게 옳겠지만 박근혜 정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50%의 대한민국과 재계의 말만 듣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박근혜 정권 1년차에 이미 예고됐다. “이제 경제민주화는 완료됐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선언은 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새누리당 소속 정치인들은 “선거에서야 무슨말을 못하는가”라고 공공연히 말했고 보수언론은 “이제라도 솔직하게 공약을 못 지킨다고 말하자”며 장단을 맞췄다. 오늘날의 ‘단두대 발언’은 이 모든 과정의 결과다.

지금 정치권이 누리과정 예산을 두고 국회를 마비 상태로 몰고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판단할 수 있다. 여야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인 누리과정 예산을 배정하는 방식에 대해 합의와 번복을 반복하고 있다. 지난 19일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누리과정 예산의 국고지원 방안 등을 국회 여야 교문위 간사와 합의했지만 김재원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가 나서서 황우여 부총리에 “월권”이라며 합의를 뒤집은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김재원 부대표의 거침없는 행보의 뒤에 청와대가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26일 오전 부산 강서구 독일 프리드리히-알렉산더 대학교 부산 캠퍼스 실험실에서 긴급 샤워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물을 뒤집어쓰고 있다. 청와대로부터 뒷통수를 맞은 자신의 처지를 온 몸으로 표현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연합뉴스)

여야는 24일과 25일 다시 누리과정 예산에 대한 합의를 진행했지만 합의가 번복됐다고 생각한 새정치민주연합 측이 상임위 보이콧을 선언하는 등 진통을 겪고 있다. 이들의 합의 내용은 다소 복잡한데, 우선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하고 부족분은 지방채를 발행해 충당하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이자는 중앙정부가 보전해주고 국고에서 누리과정이 아닌 다른 사업의 예산을 지원하는 게 핵심이다. 요약하자면 어떻게든 누리과정 예산에 중앙정부 재정이 직접 들어가지만 않으면 다른 수단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게 합의 내용의 핵심이다. 즉, 이 경우 “누리과정 예산에 중앙정부 재정을 직접 지원하지 않는다”는 게 청와대의 ‘가이드라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셈이다. 실제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은 지난 9일 “누리과정은 법적 의무사항”이라며 시도교육청과 지방정부의 자체 예산편성을 촉구한 바 있다. 물론 현재 합의안 마저도 국고지원액이 2천억원인지 5천6백억원인지 얘기가 달라 국회가 파행을 빚고 있는 것 역시 청와대의 의중이 어느 정도는 실려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국회가 합의-번복-합의-번복을 반복하고 있는 핵심 이유다.

누리과정에 대한 청와대의 이와 같은 태도는 위에서 언급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 요인의 네 번째 부분, 즉 복지제도 확대에 대한 전향적 접근이라는 비전에서 후퇴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누리과정 예산을 둘러싼 국회의 이 혼란은 오로지 박근혜 정권의 선거 공약에 대한 ‘출구전략’으로부터 빚어지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대규모 경기부양을 진두지휘한데 이어 투입된 재정이 효과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개혁’을 언급하고 있다. 구조개혁의 첫 대상은 ‘정리해고 요건 완화’라는 노동유연성 확대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내년이 오기 전 선거공약에 대한 출구전략은 마무리 되고 이제부터 더 본격적인 우파적 개혁이 시작되려는 참이다. 이에 대해 야권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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