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하게 정리하자. 통합진보당을 정치적으로 옹호하기는 어렵다. 국정원이 확보하고 검찰이 내란음모죄로 기소한 ‘이석기 녹취록’은 오타가 있지만 사실로 봐야 한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의 법리적 문제야 따져봐야 겠지만, 한국 사회를 경영하려고 하는 상식적인 정치세력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유권자들에겐 그러한 노선을 밝히지 않고 거짓으로 표를 모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일부 구성원들의 황당한 노선에 대해 실토하고 사과를 구하며 자신들의 생각은 이와는 거리가 있음을 강변하는 게 아니라, 그저 사실이 아니라고 앵무새처럼 강변하면서 ‘국정원’과 ‘조작’이란 단어만 나오면 한쪽 편을 들어주는 ‘음모론 중독자’의 지지만 획득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것과 정당 해산은 별개다. 통합진보당이란 정당의 목적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현저하게 거스르는 것이란 점을 입증하는 것은 별개의 사태다. 법원에서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RO’를 인정한다 쳐도, ‘RO’가 진짜 정치세력이고 통합진보당이 그 껍데기란 점을 입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물론 우리는 심증으로 대중에게 추인받지 못할 사상노선을 가진 한 정파가 그것을 숨기고 합법정당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후 그 노선을 실행하려 했다는 의구심을 지닐 수 있다.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역사는 그 의구심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구심에 불과할 뿐 증거는 없다.
또한 저기서 말한 ‘대중에게 추인 받지 못할 사상노선’이 어느 정도 수준의 것이었는지도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 극우파들이 상상하는 것 마냥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북한 체제를 받아들이는 적화통일’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 마냥 ‘민족자주의 관점에서 남북 화해협력을 가장 중시하는 입장’ 사이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이석기 녹취록’의 일부 내용은 전자를 암시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송두리째 그렇다고 말하려면 증거가 필요한 게 현실이다.
▲ 25일 오전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최종변론이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모종의 행동이 드러난 통합진보당원을 각각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것과 정당을 해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앞서 적었듯, ‘대중에게 추인받지 못할 사상노선을 가진 한 정파가 그것을 숨기고 합법정당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후 그 노선을 실행하려 했다는 의구심’에 대한 증거를 제출해야 한다. 작년 11월에 참여연대와 민변이 긴급하게 가진 '정부의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 긴급토론회'에서 한상희 참여연대 운영위원장(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말했듯, “통진당이 ‘RO’의 외곽단체임을 입증해야 법무부 주장이 최소한이라도 성립한다”라는 것이고, “스페인이 바스크 정당이 위헌정당임을 입증하려 했을 때는 그 부분에 치중했다. 테러단체와 바스크 정당의 연계성을 규명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데 우리 법무부가 만든 논리를 보면 이 부분은 완전히 비어 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법무부는 그 사유로 ‘진보적 민주주의’와 같은 통합진보당의 강령상 내용을 들이밀고 있다. 말하자면 ‘숨겼다’는 증거를 찾아내라 했더니 ‘안 숨긴’ 것들을 증거로 제출하는 꼴이다. 말할 수 없이 한심하다. 그렇게 법무부가 들이민 사유들은 통합진보당 바깥의 진보주의자들도 주장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 비유하자면, 법무부는 살인자가 유재하의 노래를 즐겨 들을 거라 추정하고, 자신이 살인자라 의심하는 이가 유재하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가 살인자인 이유를 써보라고 했더니 “유재하의 노래를 좋아하니까 살인범”이라고 끄적인 것이나 다름없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선글라스 끼면 다 박정희고, 대머리면 다 전두환인가?
법무부의 기동은 정당해산 제도의 취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토론회에서 한상희 교수는 “위헌정당 해산 관련 조항은 정당을 해산시키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을 해산시키기 어렵게 하려고 만든 것이다. 1958년 정부의 행정 처분으로 진보당이 해산된 사건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법개정안기초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정헌주 의원이 제안설명에서 ‘헌법에 이것을 두는 것은 정당의 자유를 좀더 효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까닭’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최종변론이 열린 25일 오후 청구인 측 대표인 황교안 법무부 장관(왼쪽)과 피청구인 측 대표인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가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로 들어서고 있다. (미디어스)
또 한상희 교수는 국제적인 맥락에서 정당해산 제도의 의미도 설명했는데, 독일, 터키, 스페인이 정당해산 제도를 가지고 있고 정당을 해산시킨 경험이 있는 상황에서 유렵 평의회 산하 베니스위원회가 이들 국가에게 한 권고나 지침을 소개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베니스 위원회는 1999년도에 정당해산 제도에 관한 지침을 만들었으며 2009년도에 터키에 새로이 권고를 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이를 재확인했는데, “베니스 위원회 지침을 보면 정당해산 제도는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 취지는 다수권력으로부터 소수정당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소수정당을 함부로 해산해서는 안 된다. 설령 소수정당이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헌법을 변화시킬 것을 선언했다 하더라도, 다만 폭력을 실제로 동원했고 실질적 위험이 있을 경우에만 해산할 수 있다”라는 것이라고 한다. 한 교수는 “심지어 베니스 위원회는 이 해산 제도에 대해 적용되지 않는 게 최선이며,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까지 했다”라고 덧붙였다.
법무부가 추가적으로 제시한 근거라는 것이 24일 <조선일보>가 대대적으로 보도한 2011년 한 민주노동당 간부가 썼다는 ‘선군사상이 지도이념’이라는 문건이다. 하지만 이 역시 이 문건이 어떤 지하당에서 작성되었을 경우 그 지하당이 이적단체라는 확신은 줄지언정, 통합진보당 혹은 구민주노동당이 그 지하당의 껍데기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이 정부에서 하는 일이 지금 이런 식이다. 폴 크루그먼이 과거 그의 저서 <대폭로>에서 부시 행정부의 행태에 규탄하면서 그들을 ‘혁명적 우익’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는 부시 행정부의 행동에 충격을 받을 이들을 위하여 ‘혁명적 우익’을 대하는 자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 바 있다.
1. 겉으로 천명된 목표를 보고 정책 제안이 그 이치에 닿는다고 추정하지 말라.
2. 약간의 숙제를 해서 진짜 목표를 찾아내라.
3. 유용한 정치 규칙이 실제 적용된다고 지레 짐작하지 말라.
4. 혁명적 세력은 공격으로써 비판에 대응한다는 것을 예상하라.
5. 혁명적 세력의 목표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런데 돌이켜보면 한국은 언제나 ‘혁명적 우익’의 나라였다. 전후 시민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내지는 중도진보를 지지했던 이 나라에서 우익은 혁명적으로 정권을 잡았고 혁명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사수했다. 이승만이 그렇게 나라를 세웠고 박정희가 나라를 뒤집은 후 이승만을 부정했으며 박정희가 암살당한 후 나라를 뒤엎은 전두환도 박정희 시대의 치부를 드러내는데 치중했다(덕분에 ‘문고리 3인방’ 등 극소수의 사람만을 신뢰하는 정치인 박근혜가 탄생했다). ‘87년 체제’라는 타협 이후 사반세기가 지났으나 여전히 ‘혁명적 우익’의 행태는 여전하다.
▲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최종변론이 열린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청년지식인포럼 스토리케이 회원이 모형탈을 쓰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 ‘보수’라 함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기존의 것을 고수하는 경향,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절차적 순리대로 일을 처리하는 자세 등을 의미한다. 통합진보당에 대해 ‘심증’이 있다면 심증 수준에서 정치적 공세를 펼쳐 유권자들이 그들을 정치적으로 외면하도록 하면 된다. 비록 그들을 향해 투입되는 국고보조금이 아까울지라도 시간을 견뎌가며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 것이 ‘보수’의 자세다.
그런데 지금은 없는 법논리를 어떻게든 쥐어짜서 정당을 없애려고 난리다. 한국의 ‘보수’는 언제나 뭔가를 ‘보수’하지는 않은 채 혁명적으로, 친위쿠데타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면서 소시민들에겐 법치주의를 강요했다. 법치주의는 준법정신과 다르며, 국가가 자의적으로 시민을 규제하면 안 된다는 이념인데도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법을 지키라고 강요했다.
무슨 이유로도 절차적 정당성을 내세우기 힘들었던 군사독재 시절에야 나라를 그렇게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명분은 ‘조국근대화’나 ‘경제성장’ 등과 같은 실질적인 과제 뿐이었으니,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일을 되게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통합진보당을 ‘속도전’처럼 해산한다 한들 얻는 것이 무엇일까.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대로 다시 결집할 것이다. 국고보조금을 끊으면 라면을 먹으며 다시 십년을 버틸 것이다. 진보진영에서 건전한 토론을 통해 그들을 걸러내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최종변론이 열린 25일 오후 청구인 측 대표인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연합뉴스)
소위 민주세력에게 정권을 뺏기고 보수진영이 가장 배가 고팠던 ‘잃어버린 10년’의 한복판, 저 몰아치는 군중들을 보수가 도저히 당해낼 수 없을 거 같았던 2004년 탄핵 반대 촛불집회의 물결을 보며 뉴라이트 운동이 시작되었다. 뉴라이트는 이념이 없는 한국 보수를 교정‧견인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세우려고 했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을 적극 긍정하는 현대사관을 주입하려 했으며 그 노력은 ‘뉴라이트 교과서’를 통해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혁명적 우익’의 계보를 긍정할 수는 없다. 계속 계속 혁명만 하는 것은 보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국 성공했고 밥은 안 굶기지 않느냐고 강변해봤자 체제의 정당성이 ‘우연’에 결부되었단 말 밖에 안 된다.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에겐 와닿지 않을 말이기도 하다. 보수가 보수로서의 정체성과 가치를 지키고 인정받으려면 결국 체제를 존중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정체’를 ‘신정국가’가 아니라 ‘민주주의’라 본다면, 체제를 망가뜨리는 건 통합진보당이 아니다. 통합진보당이란 ‘미운 놈’을 참지 못하고 그들을 쥐잡듯이 때려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공권력이다. 그들이 21세기에도 이단 색출에 여념이 없는 ‘혁명적 우익’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존경받는 보수’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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