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성희롱 사건 ‘피해자’이고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문제제기하는 사람인데, 언제나 제가 죄인이 되고 숨어 있어야 하는 게 이상했어요. 기자들을 만날 때도 저는 누구에게도 요청하지 않았는데 제 이름 대신 가명을 쓰고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더라고요. 정말 가명 써야 할 사람은, 부끄러워하고 숨어 있어야 하는 건 가해자가 아닌가요?”

한국여성민우회 바람 활동가는 몇 년 전 삼성전기에서 일어난 성희롱 사건 피해자 이모씨와 상담을 했을 당시, ‘왜 내가 숨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던 이모씨의 질문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싸움을 밟아 나가면서 다시 저를 채워나가는 것 같다”는 말도 잊히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 21일 오후 7시 30분, 합정 가장자리 협동조합에서 출판산업 직장 내 성폭력 해결을 위한 집담회 '함께 말하면 비로소 변하는 것들'이 열렸다. (사진=언론노조 이기범 기자)

21일 오후 7시 30분,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가장자리 협동조합에서 출판산업 직장 내 성폭력 해결을 위한 집담회 <함께 말하면 비로소 변하는 것들>이 열렸다. 패널을 비롯해 20~30명 정도 참석하는 소규모 모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과 달리,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몇 번이나 책상을 이동하고 의자를 더 두어야 했다. 아프고 괴롭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가해자’라는 것을 알리고 싶은 이들부터 도처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나누기 위해 참석한 이들까지… 60여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함께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들 혼자 싸워요. 연대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정사원 전환을 사흘 앞두고 인사권자인 이모 상무에게 ‘위계에 의한 성추행’을 당한 책은탁(가명) 전 쌤앤파커스 마케터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10개월 동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후배 역시 이모 상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오히려 더 빨리 드러내지 못한 것에 후회했다. 자신이 더 빨리 문제제기를 했더라면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하면서. 2012년 9월의 일은, 이렇게 2년이 지난 올해 9월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출판 마케터가 마냥 설레는 ‘나의 직업’이었던 때가 있었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던 책은탁 씨는 곽은영 시인의 <불한당들의 모험 27>을 낭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명랑할 수 있는 것은 머리끝까지 절망이 뿌려졌기 때문이야’
‘내가 명랑할 수 있는 것을 욕을 할 줄 알기 때문이야’
‘누군가 물을 찾으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혼자서 땅을 판다’
‘충분히 괴로웠기 때문에 괴로운 이야기가 싫었다’
‘붉은 먼지를 너무 많이 마시면 귀를 씻고 싶게 만드는 말들이 웅웅거렸다’
‘가만가만 지구의 심장소리를 듣는 심해를 생각해’
‘아직은 죽지 마 아직은 죽지 마’

책은탁 씨는 “‘말뚝처럼 모두들 혼자서 땅을 판다’고 돼 있다. 다들 혼자 싸운다. 연대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히 괴로웠기 때문에 괴로운 이야기를 피하죠’. 근데 떠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라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피해자님들 겁먹고 숨지 마세요’. 목표도 하나다. ‘부끄러운 건 가해자가 되어야죠’”라고 말했다.

▲ 쌤앤파커스의 출판 마케터였던 책은탁 씨는 "피해자님들 겁먹고 숨지 마세요. 부끄러운 건 가해자가 되어야죠"라고 말했다. (사진=언론노조 이기범 기자)
하지만 책은탁 씨가 맞이한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형사소송에서 졌기 때문이다. 검찰은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두 번이나 이모 상무를 무혐의 처분했다. “피해자께 사죄드린다”던 쌤앤파커스 박시형 대표는 이 과정에서 이모 상무를 옹호하는 내용의 진술서를 썼다. 한때 같이 일했던 동료들은 성폭력 문제 해결을 촉구하자 “당신이 봤어?”, “증거 있어?” 등의 폭언으로 2차 가해를 서슴지 않았다. (▷ 관련기사 : <쌤앤파커스, 성폭력 문제해결 촉구하자 “당신이 봤어?” 폭언>)

“그 사람들(쌤앤파커스)은 제 개인 계정까지 다 사찰했다”고 말을 꺼낸 책은탁 씨는 “제가 뭐든, 이모 상무가 성추행을 한 건 성추행을 한 것이다. 그런데 판사들은 굉장히 간단하게, 가장 편하게 ‘증거불충분’을 냈다. 도대체 증거를 얼마나 내야 ‘증거충분’이 되나”라고 반문했다. 직접 출두해서 증언을 해 준 친구도 있었고, 사건 당일 겨우 도망쳐 나온 후 이모 상무 오피스텔 앞에 쓰러져 있던 책은탁 씨를 구해 준 시민의 증언도 있었지만 무시됐다. 책은탁 씨는 “오피스텔 각 방마다 CCTV라도 달아야 (혐의가 인정이) 되나 싶더라”고 토로했다.

책은탁 씨는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다. 여자친구가, 부인이, 딸이 당할 수 있는 일이다. 남성분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이건 우리의 문제라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남자 피해자도 많다. 술 취하면 집적거리는 여자 상사도 많다. 이건 여성만의 문제도, 제 또래만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던진 칼을 온 몸으로 받는, 그래도 살아서 내게 나타나는 친구’가 되고 싶다는 그는 “사실 해결이 돼야 낫는다. 해결이 안 되는데 제가 어떻게 나을 수 있는가. 이건 힐링 가지고 될 일이 아니다. 본질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라면서도 “많은 분들이 싸워주셨으면 좋겠다. 직접 싸우기 어렵다면 출판노조,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도움 구할 수 있는 곳과 접촉하면 된다”고 당부했다.

직장 내 성폭력 ‘인식’과 ‘매뉴얼’ 모두 부족… 정규직도 피할 수 없는 ‘성폭력 위험’

전국언론노동조합 출판노조협의회는 출판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고 정당한 조건에서 일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지난 8월 25일부터 10월 31일까지 <출판노동실태조사>(여성 395명 남성 119명 총 514명 참여)를 진행했다. 이 가운데 직장 내 성평등 및 성폭력 대응에 대한 설문조사 내용을 보면, 성희롱 예방교육이 충실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업무와 관련해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일이 일어나도 사후 조치가 미흡한 경우가 많았다.

회사에서 지난 1년 사이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받지 않았다는 응답이 48%(246명)로 절반에 가까웠고, 받았지만 실효성이 없었다고 생각한다는 응답이 37%(191명)이었다. 예방교육을 받았고 내용도 실효성 있었다고 한 응답은 15%(77명)에 불과했다.

업무와 관련해 성적 수치심을 느낀 경우를 묻자(복수응답 가능), 성적인 언어희롱 19%(99명), 의도적인 신체 접촉 13%(65명), 일과 후 개인적 만남 강요 3%(16명), 욕설 3%(14명) 순이었다.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한 가해자는 사용자나 상사가 21%(108명)로 가장 많았고, 저자와 역자 등이 13%(69명), 직장 동료 5%(24명), 거래처 사람 3%(17명)이 뒤를 이었다.

성적 수치심을 느꼈을 때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했다는 응답은 7%(36명)에 그쳤고 문제제기하지 않았다는 응답이 25%(127명)로 3배 이상 높았다. 사후조치가 불만족스럽다고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는, 직장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응 매뉴얼이 부재하다는 응답이 9%(46명), 조치 후 오히려 피해자의 입장만 곤란해졌다는 응답이 6%(33명), 가해자 처벌이 부족했다는 응답이 5%(25명), 조치 과정에서 2차 가해가 발생했다는 응답이 2%(9명)로 나타났다.

메이데이에서 일하는 계영 씨는 명목상으로는 늘 정규직이었지만 ‘출판계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많은 일을 겪었다. 올해 5월 열린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 회원 행사 뒤풀이 장소에서 업계 선배로 만난 한 남성이 허벅지를 만지는 성추행을 했고, 항의에도 사과는커녕 오히려 같은 추행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계영 씨는 “당사자는 ‘술에 취해서 기억이 안 난다. 목격자 말을 듣고 보니 그랬나 보다. 인정한다’고 했다. 그때 목격자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라고 말했다.

뻔뻔한 가해자를 맞닥뜨린 경험도 털어놨다. “출판계에는 특히 머리와 이론으로는 잘 알고 있는데 실제 행동은 전혀 다른 사람도 있다. 가해자 진술서를 보면 본인의 행동에 대해 진솔하게 반성하는 게 아니라 ‘나도 과거에는 여성학 교양과목을 좀 들었다. 요새 페미니즘 동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찾아보겠다’ 하는 식이다. 본인 자존심에는 전혀 상처가 없더라”고 꼬집었다.

계영 씨는 “책을 만들어 먹고 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출판계에) 오지만 사실 목소리 내기가 힘들다. 출판사들끼리의 네트워크가 강하기 때문에 (가해자는) 다른 영향을 받지 않지만 피해자는 한 마디만 해도 치명적으로 팍 쓰러질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이런 문제는 계속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얼마나 불리한 구도에 내던지는지 알게 된다. 말할수록 내 전략과 입장을 노출하고, 내 말과 행동이 주목받아 점점 약자가 된다. 하지만 싸우지 않고 있는 게 더 괴로웠다.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얘기하게 됐다”며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고, 문제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고 ‘혼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힘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모범답안 찾기는 힘들지만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1년에 300여 건의 상담을 소화하고 있다는 한국여성민우회의 바람 활동가는 출판계를 비롯해 영세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직장 내 성폭력의 특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영세 사업장에서는) 성폭력 이후에도 다양한 불이익들이 발생한다. 동료가 아니라 성적인 대상으로 인식하면서 애인이 되어줄 것을 강요한다. 성적인 제안을 해서 그걸 수락하면 근로조건을 낫게 해 주겠다는 사례도 있었다. 회식자리든, 업무공간에서든 원치 않는 신체접촉이 일어났다. 문제제기하면 권한을 이용해서 피해자를 회사에서 쫓아내는 경우들이 많았다. 출입문 번호키를 바꾼다거나 쓰고 있던 사무실 집기 뺀다거나. 이 사람이 담당하는 업무가 뻔히 있고 사직 의사 밝힌 게 아닌데 구인광고 페이지에 그 업무를 맡을 사람을 뽑는 등 타의적으로 회사를 나가게 하는 분위기가 많이 있었다”

민주노총 김수경 여성국장은 “민주노총에는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는 매뉴얼이 있다. 하지만 그건 ‘매뉴얼’일 뿐이다. 그것만 따라간다”며 “결국 노조가 해야 할 역할은 피해자가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사건에 대해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한 태도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김수경 여성국장은 성희롱 피해를 겪었을 때 ‘당당하게 말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동 성폭력 상황에서 ‘안돼’, ‘싫어’라고 말하라고 하지 않나. 마찬가지로 ‘이것 성희롱입니다’라고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환경과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며 “가장 중요한 건 노조가 앞으로 나서서 내부 피해자들과 함께 연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이종우 출판노조협의회 의장이 파주출판단지 쌤앤파커스 건물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사진=트위터 @happybooknodong)
박진희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 출판분회장은 “출판계는 굉장히 우아하고 지적인 세계라고들 한다. 하지만 책을 만드는 노동자들은 어떤 환경에 놓여 있나”라며 “새로운 사상을 수입하고 문화의 첨병 역할을 하는 등 굉장히 훌륭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일을 한다면 그 책을 만드는 과정 역시 아름다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박진희 분회장은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 봐도 사실 답을 모르겠더라. 누구도 어떤 방법이 최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도 “모범답안을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만은 명확하다”고 전했다. 이어, “더 크게 말해야 한다. 출판노조도 끝까지 이 사건(쌤앤파커스 책은탁 씨 사례)을 끌고 나갈 생각”이라며 “피해자가 혼자 남지 않게 함께 싸우는 것이 우리 모두의 숙제”라고 덧붙였다.

출판노조협의회 쌤앤파커스 성폭력 사건 대책위원회는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단 하루의 연대’라는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파주출판단지 쌤앤파커스 사옥 앞이나 서울 마포구 서교동 쌤앤파커스 사무실 앞 둘 중 한곳을 정해 낮 12시~1시 사이에 30분 간 피켓 시위를 진행하면 된다. (※ 문의 : 트위터 @happybooknodong / 카페 바로가기 / 이메일 happybooknod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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