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리>를 보기 전에 기대했던 건 뭐니뭐니해도 전차를 앞세운 전투였습니다. 많고 많은 전쟁영화의 틈에서 <퓨리>가 차별점을 갖는 것이 바로 전차의 도입이었으니 당연한 기대였습니다. (물론 탱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가 처음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미국의 셔먼 전차는 물론이고, 연합군을 벌벌 떨게 했던 독일의 티거 전차마저 최초로 실물을 동원했으니 희소성까지 갖췄습니다. 고로 <퓨리>는 남성성으로 가득한 영화인 동시에 '밀리터리 매니아'의 관람욕구에 불을 지폈습니다. 역으로 이 때문에 북미에서는 여성관객을 잡지 못해 흥행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퓨리>는 남성관객인 저의 기대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만족을 줬습니다. 시종일관 화끈한 전차전으로 눈과 귀가 즐겁기를 바라는 관객이라면 외려 조금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몇 번의 전투가 벌어지는 중에 전차를 앞세운 보병전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리고 티거와의 일전은 짜릿한 박진감을 선사한다는 건 사실입니다. <월드 오브 탱크> 같은 게임을 해본 분이라면 더 큰 만족을 얻을 것도 같고, 티거와 셔먼의 대결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는 광경은 어느 정도 고증을 반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영화가 고증에 들인 노력은 상당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퓨리>는 마냥 전차를 위시한 볼거리와 재미만을 추구하는 오락 일변도의 영화가 결코 아닙니다. 제가 결정적으로 맘에 들었던 게 이것입니다. 전차전의 비중은 낮아서 아쉬울 수 있을지언정, <퓨리>는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워 대디'를 필두로 각 인물의 심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전쟁의 참상과 그 속에 놓인 인간성의 보존을 진지하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전쟁영화에서 아주 색다른 전략이라곤 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할리우드 전쟁영화의 걸작들인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풀 메탈 자켓>은 전쟁이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한편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단 한명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무릎쓰는 모순적인 상황을 통해, 전쟁이라고 하는 인간성 말살의 참혹한 무대에서도 반드시 우리가 지켜야 하는 인간애와 그 가치를 생생하게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데이빗 에이어 감독의 <퓨리>는 바로 저런 영화들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앞선 세 영화와 같은 암담하고 묵직한 현실을 고발하는 주제의식과 연출은 피하는 동시에, 드라마의 성격이 과도하게 짙어지는 것도 경계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작품성과 오락성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잡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덕분에 관객은 재미와 메시지를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퓨리>가 관객의 시점으로 놓은 인물은 로건 레먼이 연기한 노먼입니다. 총도 제대로 쏠 줄 몰랐던 신병인 그가 졸지에 전차부대원으로 차출이 되고, 다른 전우들과 함께하면서 이상적인 세계가 아닌 잔인한 현실과 마주하며 조금씩 적응하는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이 과정은 상영시간이 두 시간이 넘지만 아무래도 성급한 면이 없지 않으나, 충분히 설득력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를 통과하면서 관객의 몰입을 돕고 있습니다.

<퓨리>에서 노먼 이상으로 매력적인 인물은 역시 워 대디입니다. 이름부터가 '아빠'인 그는 이 영화가 노먼의 비정한 성장기라는 걸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오프닝에서부터 워 대디가 어떤 인물인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줬던 데이빗 에이어는, 그의 내밀하고 불안한 심리를 종종 포착하면서 왜 현재와 같은 비정한 인물로 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노먼에게 "이상은 평화적이지만 역사는 폭력적"이라는 말로 전쟁을 지배하고 있는 힘의 논리를 설파했던 인물도 다름 아닌 워 대디였습니다. 궁극적으로 <퓨리>는 이 두 인물을 중심으로 제아무리 굳은 (종교적) 신념과 정의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전쟁은 그의 인간성과 인격 등을 모조리 말살시키는 인류 최악의 재난이라는 걸 재삼 역설합니다. 관객에 따라서는 진부하다고 느낄 수도 있으나 각 인물의 심리와 그것의 변화를 잘 보여줬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습니다.

또 하나의 인물이었던 전차는 곧 <퓨리>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는 대상입니다. 전투의 선봉장으로 나서 위용을 떨치며 적군을 몰살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때로는 진흙투성이의 땅에 널부러진 시체마저 냉정하게 밟고 지나가지만, 워 대디와 부대원들은 그 안에서 누구보다도 끈끈한 전우애를 나누며 서로를 믿고 의지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어야 할 곳에서 견고한 장갑과 무시무시한 화력을 갖춘 전차지만, 그 안은 전쟁이 허용하지 않는 인간미와 인간애가 있는 것입니다. 도입부에서 워 대디가 백마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은 그의 캐릭터를 대번에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결말부에 이르러 이 백마는 잠깐 스쳐지나감으로서 <퓨리>의 주제를 담은 상징으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라서 더 얘기하긴 어렵고 다소 작위적이라는 인상도 받았으나, 이 정도의 화술을 갖췄다면 몇 번을 들어도 좋을 설교입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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