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적으로 <퓨리>는 남성관객인 저의 기대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만족을 줬습니다. 시종일관 화끈한 전차전으로 눈과 귀가 즐겁기를 바라는 관객이라면 외려 조금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몇 번의 전투가 벌어지는 중에 전차를 앞세운 보병전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리고 티거와의 일전은 짜릿한 박진감을 선사한다는 건 사실입니다. <월드 오브 탱크> 같은 게임을 해본 분이라면 더 큰 만족을 얻을 것도 같고, 티거와 셔먼의 대결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는 광경은 어느 정도 고증을 반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영화가 고증에 들인 노력은 상당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퓨리>는 마냥 전차를 위시한 볼거리와 재미만을 추구하는 오락 일변도의 영화가 결코 아닙니다. 제가 결정적으로 맘에 들었던 게 이것입니다. 전차전의 비중은 낮아서 아쉬울 수 있을지언정, <퓨리>는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워 대디'를 필두로 각 인물의 심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전쟁의 참상과 그 속에 놓인 인간성의 보존을 진지하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전쟁영화에서 아주 색다른 전략이라곤 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할리우드 전쟁영화의 걸작들인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풀 메탈 자켓>은 전쟁이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한편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단 한명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무릎쓰는 모순적인 상황을 통해, 전쟁이라고 하는 인간성 말살의 참혹한 무대에서도 반드시 우리가 지켜야 하는 인간애와 그 가치를 생생하게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퓨리>에서 노먼 이상으로 매력적인 인물은 역시 워 대디입니다. 이름부터가 '아빠'인 그는 이 영화가 노먼의 비정한 성장기라는 걸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오프닝에서부터 워 대디가 어떤 인물인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줬던 데이빗 에이어는, 그의 내밀하고 불안한 심리를 종종 포착하면서 왜 현재와 같은 비정한 인물로 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노먼에게 "이상은 평화적이지만 역사는 폭력적"이라는 말로 전쟁을 지배하고 있는 힘의 논리를 설파했던 인물도 다름 아닌 워 대디였습니다. 궁극적으로 <퓨리>는 이 두 인물을 중심으로 제아무리 굳은 (종교적) 신념과 정의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전쟁은 그의 인간성과 인격 등을 모조리 말살시키는 인류 최악의 재난이라는 걸 재삼 역설합니다. 관객에 따라서는 진부하다고 느낄 수도 있으나 각 인물의 심리와 그것의 변화를 잘 보여줬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습니다.
또 하나의 인물이었던 전차는 곧 <퓨리>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는 대상입니다. 전투의 선봉장으로 나서 위용을 떨치며 적군을 몰살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때로는 진흙투성이의 땅에 널부러진 시체마저 냉정하게 밟고 지나가지만, 워 대디와 부대원들은 그 안에서 누구보다도 끈끈한 전우애를 나누며 서로를 믿고 의지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어야 할 곳에서 견고한 장갑과 무시무시한 화력을 갖춘 전차지만, 그 안은 전쟁이 허용하지 않는 인간미와 인간애가 있는 것입니다. 도입부에서 워 대디가 백마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은 그의 캐릭터를 대번에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결말부에 이르러 이 백마는 잠깐 스쳐지나감으로서 <퓨리>의 주제를 담은 상징으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라서 더 얘기하긴 어렵고 다소 작위적이라는 인상도 받았으나, 이 정도의 화술을 갖췄다면 몇 번을 들어도 좋을 설교입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