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오랜만에 진보정당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을 만났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당연히 민주노총 지도부 직선제 선거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지금 판세가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도저히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데, 그래도 4번이 이기긴 하겠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선거 홍보용 포스터들을 보니 제법 알려진 얼굴들이 보인다. 기호 4번 전재환 후보조는 본인들 말로는 ‘통합지도부’라고 하는데, 세간에는 ‘국중연합’이라고들 한다. 단병호 위원장으로 대표되는 시기에 민주노총 및 산별연맹 지도부를 장악했었던 이들을 보통 ‘민주노총 중앙파’라고들 부른다. 지금까지 중앙파 활동가의 한 사람으로 분류됐었던 전재환 위원장 후보가 국민파로 분류됐던 후보들(정확히는 전국회의와 국민파이다)과 연합을 했다. “4번이 이기긴 하겠지”라는 전망과 ‘통합지도부’라는 슬로건은 이들의 연합이 민주노총 내 최대정파라는 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기호 1번 정용건 후보조의 얼굴들도 익숙하다. 정용건 위원장 후보와 이재웅 사무총장 후보는 둘 다 과거 중앙파이거나 아니면 친-중앙파 등으로 분류됐던 인물들이다. 기호 4번 후보조의 통합지도부 구성 논의를 거부하고 출마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호 2번 한상균 후보조 역시 얼굴이 익숙하다. 그 치열했던 쌍용자동차 파업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현장파’로 불렸던 ‘노동전선’이 미는 후보조라고 한다. 기호 3번 허영구 후보조는 ‘좌파노동자회’라는 조직을 등에 업고 출마를 했다. 허영구 위원장 후보는 민주노총 부위원장을 오랫동안 했다. 민주노총 규약에 ‘부위원장은 허영구 외 약간 명으로 한다’는 부분을 넣어야 한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였다.

▲ 직선제 선거에 출마한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 후보자들.

“현대자동차가 미는 후보가 당선되지 않겠어요?” 나름대로 생각을 해서 질문을 던져봤다. 직선제 선거라는 건 정파적으로 조직된 대의원들이 표결을 하는 문제와는 또 다르다. 온 국민이 관심을 갖는 대통령 선거와도 다르다. 일단 어찌됐든 무조건 조합원들이 투표에 참여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려면 노동자들이 한 군데 모여있고 집행부의 지도력이 확실한 조직이 유리하다. 라인 끄고, 조합원들 투표함까지 줄 세우고, 투표 마치신 분들 밖에 나가서 담배 한 대씩 핍시다, 뭐 이래야 된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만큼 조합원들 투표 유도에 좋은 곳이 없다.

그래도 모르겠다고들 한다. 민주노동당 시절, 꼭 현대자동차가 같은 데가 아니더라도 당 지도부 선거하는데 열심히들 투표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기호 1번 정용건 후보는 사무금융연맹 출신이다. 사무금융연맹 소속 조합원들은 민주노동당 당직 선거에서도 ‘조직표’로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니 혹시 모른다. 혹시 모르는 건 다른 후보들도 마찬가지다. 기호 2번 한상균 후보조는 ‘쌍용자동차 파업’이라는 대중적 당위를 갖고 있다. 직선제이니 만큼 노조 집행부 및 정파 ‘지침’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의 조합원들이 기꺼이 표를 던질 가능성이 있다. 허영구 후보조도 마찬가지다. ‘옳은 길을 간다, 그래야 민주노총’이라는 가장 선명한 구호를 내세우고 있는데다, 구관이 명관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영원한 부위원장 허영구 후보를 한 번쯤 믿어볼만 하다.

그리하여 이 선거의 결과를 말하려고 하면 민주노총이 한 번도 직선제를 해보지 않아 정확히 예측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게 정답이긴 할 듯 싶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 중 누가 된들 민주노총이 지금과 크게 달라지기야 하겠느냐는 의구심이 활동가들과 진보적 대중 사이에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 결과에 대해 ‘운동권’들조차 시큰둥할 수밖에 없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죽겠다’는 목소리는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다. 당장 씨앤앰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옥외전광판에서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거리로 나섰고 아파트 경비원 노동자의 사망사건으로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가 다시 환기되고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달 비정규투쟁주간을 선포하고 집회를 열었지만 이게 실질적으로 비정규직 투쟁의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누구도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 오히려 사태 수습의 열쇠는 진보교육감이나 이런 저런 시민사회단체들의 중재에 있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여기서 민주노총의 역할은 그 수많은 시민사회단체의 하나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굳이 정규직 중심 노동운동의 폐해라고 말할 것도 없다. 민주노총 역시 계약직, 사내하청, 특수고용, 용역직 등으로 노동계급을 사분오열시키는 자본의 전략에 패배한 당사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입주해있는 건물의 사무실을 성역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해 경찰이 철도노조 지도부 검거를 빌미로 삼아 민주노총을 침탈한 사건은 활동가 및 진보적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과거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극악무도한 시대에 살다 보면 민주노총 사무실도 침탈당할 수 있다. 오히려 이들의 심리적 패배는 그 이후에 명백해졌다. 철도노조 지도부가 도망을 잘 갔다고 자위할 일이 아니다. 노동운동의 상징적 공간을 탈탈 털려도 별로 할 것이 없는 무기력한 노동운동의 현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분노와 한탄은 그저 잠시에 그쳤다.

노동운동의 붕괴는 진보정치의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존하는 어떤 진보정당도 노동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정치 캠페인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럴 의지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해봐야 티가 안 나기 때문일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박수도 양손의 짝이 맞아야 친다는 것이다. 현장을 헤집고 다니는 건 오히려 새정치민주연합의 을지로위원회다.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 같으면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서로 짝을 맞추어 박수를 치겠으나 이제는 현장의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이 진보정당 보다 힘센 제1야당과 직거래(?)를 한다. 진보정치와 마주보고 박수를 칠 상대는 이제 남아있지 않다. 남은 건 야구팀인 롯데 자이언츠의 CCTV 선수 감시 논란에 슬쩍 얼굴을 비춰보는 것이거나 자신들의 존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선거구제 개편 논의 등을 시도해보는 것 정도다.

진보정당들끼리의 재편 논의는 그간의 좌충우돌에 지친 탓인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노총 선거에 나선 후보들이 ‘진보대통합’ 논의를 두고 입씨름을 벌인다. 그마저도 ‘금속’과 ‘공공’의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에 대한 태도가 달랐던 탓에 동력을 잠시 잃은 상태라는 뒷말도 나온다. 일부에선 자조적인 한숨을 내뱉는다. 그토록 오랫동안 염원했던 민주노총 80만 조합원의 직선제 선거가 이렇게 힘빠지는 행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다. 위원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정파들의 부정선거 움직임이나 사측의 조직적 개입 우려 같은 것은 오히려 사치였다. 씨앤앰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올라가있는 전광판을 올려다 보는 것이 두렵다고들 한다. 이 모든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무슨 일부터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아무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