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인기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제 강점기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 흠칫했다가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하는 이가 일본인일 때 흔히 맞닥뜨리곤 하는 어떤 관문이다. 다행스럽게도 하루키의 역사 인식은 올곧았고 학창시절부터 모아온 그의 텍스트를 버리지 않아도 되었다.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하루키는 보상이나 반성은커녕 지난 역사를 올곧게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현 일본인들의 무정함을 꾸짖었다.
"1945년 종전과 관련해서도 2011년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와 관련해서도 누구도 제대로 책임을 지고 있지 않다. 나빴던 것은 군벌이고, 일왕도 이용당했고, 국민도 모두 속아서 엄청난 일을 당했다며 하소연한다. 모두가 "희생자, 피해자"가 되어 버려 결국 누구도 나쁘지 않았던 셈이 되어 버렸다. 이래서는 중국인도, 한국인도 화를 낼 수밖에 없다."
가해자가 책임을 회피한 채 남의 탓으로만 넘기고 도리어 희생자인 척 가장하고 있으니 진짜 피해자인 한국과 중국이 화를 낼 수밖에 없다는 일침이었다. 내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그릇된 애국심보다 썩은 부위를 도려내게 하는 용기가 얼마나 현명하고 아름다운가를 되새기게 한다.
소설가든 연예인이든, 유명인이 곧 공인은 아니다. 제 할 도리도 못하고 그저 착하기만 한 사람에게 예술가라는 칭호를 붙여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니 어마무시한 인성이나 매너를 기대하진 않는다 해도 역사의 핵이나 다름없는 세계대전의 가해자, 피해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은 존중해주고픈 마음이 없다. 그것은 전쟁의 야욕에 아스라이 사라져간 희생자를 향한 모독이자 현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점검해야 할 지난 역사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이들을 공공의 적이라 명명하고 싶다.
나치 논란을 일으켰던 걸그룹 프리츠의 소속사가 공식 입장을 밝혔다. 메이저는커녕 소규모의 마니아도 채 형성되지 않았던 신생 그룹 프리츠는 오로지 팔에 단 나치 무늬의 완장으로 단숨에 화제를 모으며 실시간 검색어를 장식했다. 그래서였을까.
별보다 많은 신인들이 배출되는 연예계에서 어떻게든 이름을 알릴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이들에게 부정적이든 우호적이든 이만큼의 관심은 그저 반가운 것이었나 보다. 그 해명이라는 것이 가히 가관이며 나치 완장을 수정할 계획이 없다는 포부가 거의 적반하장 수준이다.
"무서운 지역, 즉 지금도 세계에 평화를 방해하는 단체들과 악의 축이 되는 테러를 일삼는 무리들, 권력자들이 명분 없이 저지르는 만행과 학살에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있다" "슬픈 비극이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도 이를 강 건너 불구경 정도의 것으로 이야기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프리츠의 포부와 강한 의지를 표현하고자 X표의 붉은 완장을 착용했다. 네 방향으로 뻗은 화살표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의미로 사방으로 멀리 뻗어나가 소통과 화합을 하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다“
지난 2일 부산에서 열린 행사장에서 걸그룹 프리츠가 오른팔에 찬 완장은 독일 나치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논란을 일으켰다. 간혹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특수 효과의 남용인지 제국주의를 찬미하는 전범기의 오용인지가 모호했던 욱일기 사용 논란과 달리, 그녀들의 십자가 무늬는 ‘갈고리 십자가’라는 의미를 가진 빼도 박도 못할 나치스의 상징이었다. 일본과 달리 역사의 가해자라는 인식이 팽배한 독일에서는 하켄크로이츠의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 정도의 적나라함이라면 모르는 것도 죄라고 꾸짖고 싶으나 정말 몰랐다는데 뭘 더할 것인가. 허나 무지에서 비롯된 실수라 외면하려 했던 당초 계획을 뒤엎어버린 ‘X자 무늬는 소통과 화합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소속사의 뻔뻔한 궤변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첫 번째 해명에서 소속사는 분명 나치 문양은 의도한 것이 아니며 그저 스타일리스트의 권유를 점검하지 못한 실수라고 변했다. 메탈 계열의 노래와 어울릴 것 같아서, 밋밋한 검정색의 무대 의상에 포인트를 주기 위해, 빨간 색만 보고 괜찮은 것 같아서. 그저 미적 효과를 위해 선택되었을 뿐 제대로 점검조차 하지 않은 실수의 산물이었다던 완장이 한순간에 프리츠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소통과 화합의 상징인 사통팔달의 의미’라고 바뀌니 코웃음이 나올 뿐이다.
전쟁과 살육을 찬미하는 나치스의 상징에 ‘소통과 화합’을 스케치하고 세계 평화를 채색했다. 명분 없는 학살에 희생되는 슬픈 생명을 위로하기 위해, 권력자의 만행과 학살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X표의 붉은 완장을 착용했다는 소속사의 해명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프리츠의 소속사는 이를 수정한다면 노이즈 마케팅임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결단코 완장 수정 계획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모두가 "희생자, 피해자"가 되어 버려 결국 누구도 나쁘지 않았던 셈이 되 버렸다. 이래서는 중국인도, 한국인도 화를 낼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 사람도 아닌 일본인, 하루키의 일침이 귓가에 울린다. 멍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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