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이라 했다. 24시간 채널이 스무 개가 넘게 생기고 선진국에 뒤쳐진 뉴미디어가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것이라 장담했다. 3년 후 장미빛 미래는 어디에도 없었고 문 닫는 회사들만 늘어갔다. 그래도 미련은 버릴 수 없었던가. 위성으로 디지털 방송을 볼 수 있단다. 백 여개가 넘는 새로운 채널이 또 생길 것이니 콘텐츠를 준비하란다. 위성은 저 우주로 쏘아 올렸지만, 누구도 몇 년 동안 그 위성의 신호는 받지 못했다. 그 다음엔 이동 중에도 볼 수 있는 TV를 만든다고 했다. 새로운 수요가 넘쳐날 것이란다. 거실 TV를 벗어난 또 다른 시장이 열릴 것이라 호언했다. 몇 년 후 사업자로 선정되었던 기업은 위성 발사 비용도 못 건졌다며 차라리 위성이 떨어지길 바랐다. 하지만 지나온 판에 연연하면 꾼이 아니듯 뉴미디어라는 도박은 끝을 몰랐다. 이번엔 정부가 벌여놓은 판에서 본전도 못 찾은 큰 손들이 다른 판을 깔았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방송이란다. 방송인지 통신인지 구분을 못짓던 정부는 법까지 따로 만들었다. 인터넷 세상 속 꿈의 방송이 될 것이라 했다.

정부는 매 번 새로운 일자리가 몇 만 개 만들어지고, 콘텐츠가 더 많이 필요하니 창의적인 인력을 육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학자들은 숱한 외국 사례들을 뒤져 새로운 시장의 모습을 그려냈고, 사업자들은 수백 장의 사업계획서를 써냈다. 그러나 누구도 묻지 않고,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죽었을 때 그 거위를 키우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창의 인력이라 치켜세우며 만들었던 아카데미의 그 많던 수료생들은 어디로 갔는지 말이다. 초고속 인터넷과 고화질 방송이 거실의 TV까지 가려면 어떤 사람들이 필요했는지, 수백 장의 사업계획서에 숫자로 적어 놓은 인력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방송 채널은 넘쳐났고, 어디에서나 TV를 볼 수 있었으며, 숱한 부가 서비스들이 나열되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다.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다

실패라고 할 수는 없었다. 기대에 부푼 청사진은 날아갔어도 시장은 열렸기 때문이다. 정부와 학자들이 그렸던 그림은 지워졌고 오직 수익만이 중요했다. 가격을 내렸기에 더 많은 가입자를 확보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었다. 케이블인지, 위성인지, 인터넷 망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방송에 인터넷, 전화, 휴대폰까지 묶어서 팔았다. 한 쪽이 신기술이라며 자신들의 가입자를 넘보면 다른 쪽은 그건 불법이라며 정부에게 달려갔다. 정부는 ‘공정 경쟁’을 외치며 시장 점유율을 계산했다. 자신들은 ‘중립적이며 객관적’이라는 학자들을 불렀다. 그들은 또 다시 자신들만 읽을 수 있는 외국의 사례와 복잡한 수식으로 법률의 한 줄 한 줄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엔 꼭 ‘공정 경쟁 확보 방안’이란 꼬리표를 붙였다. 그 와중에 사업자들은 가입자 확보에 그렇게 열을 내면서도 오직 거래처만 만났다. 어떤 콘텐츠를 사올지, 어떤 채널을 넣을지 방송 시장판에서 그들은 협상을 했고, 때로는 협박을 했다. 언제부터인가 플랫폼이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콘텐츠를 얹어 줄 가판이란다. 더 큰 가판을 가지려는 싸움을 끝을 몰랐다. 그러나 가입자들은 사업자들을 볼 수 없었다. LG, SK, 무슨 케이블 같은 로고와 이름만 보였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가입자들을 두고 이전투구를 하면서도 사업자들은 정작 가입자들을 만나지도 않았다. 가입자는 요금과 가구 수의 숫자로만 읽혔고, 숫자가 달라질 땐 협력업체를 부르면 끝이었다. 정부가 앞장 서 디지털 전환을 요구할 때도, 이들은 협력업체만을 불렀고 실적 목표를 던져줬다. 가입자 확보와 디지털 전환은 액셀의 시트와 전화 몇 통이면 해결됐다. 디지털 셋톱박스와 검은 선로들은 가입자들에게 제발로 걸어가는 듯 했다. 정부도 흐뭇했다. 매년 수십 장의 실태조사보고서를 꼬박 꼬박 받았고 셀 수 없이 많은 표와 그래프를 만들었다. 학자들은 성과를 계산했고 평가를 내렸으며, 때로는 사업자들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묻지 않고,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가입자 경쟁을 말하면서도 누가 가입자들을 만나는지, 디지털 전환을 독촉하면서도 누가 장비를 교체하는지 말이다. 신기술의 불법성을 말할 때도, 부가서비스의 경쟁력을 말할 때도 그랬다. 학자들은 결합상품의 효용을 계산하고 수조 원의 시장가치를 계산해 냈다. 하지만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다.

“그냥 케이블이요”

어쨌든 채널은 늘어났고 화질도 괜찮으며 서비스도 많아졌다. 방송을 신청하니 인터넷에 전화까지 신청하면 더 싼 값에 해 준단다. 가끔씩 유료채널도 공짜로 보여준다. 이사 갈 때면 하루라도 TV 없이는 못사는 사람처럼 오늘 당장 설치해 달라 전화한다. 다른 집 무슨 무슨 TV가 좋아보여 바꾸겠다고 전화하니 ‘약정’이란게 있어서 못 바꾼단다. 내가 호갱님이냐며 한바탕 난리를 쳤더니 다른 업체에서 문자가 왔다. 현금을 더 줄 테니 당장 신청하란 희소식이다. 새로 신청을 하니 기사 한 명이 집으로 왔다. 인터넷 모뎀에 셋톱박스에 뭔지 모를 단말기까지 한 무더기를 들고 온다. 설치가 끝나니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며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난다. “해피콜이라고 전화 오면 얘기 잘 해주세요.” 어려운 일 아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이고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좋게 말하면 된다.

그렇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회색의 작업복과 둥글게 말린 케이블선만이 기억난다. 매월 요금은 문자로 오고, 채널 변경 확인은 홈페이지에서 하란다. 무엇인가 고장나 전화를 하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만을 듣고, 또 다시 기억할 필요 없는 누군가가 다녀간다. 하긴 기억할 것은 요금 밖에 없다.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아무도 말을 건네지 않는다. 옆 집에서 물어 본다. “그 집은 테레비 뭐 봐요?” “그냥 케이블이요.” 여기에도 사람은 없었다.

거기, 사람이 있다.

20년 남짓 누구도 묻지 않고,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부가 호언장담했던 일자리 수 1/n이었던 사람들, 사업계획서의 수 많은 표 중에 한 칸에 들어갔던 사람들, 가입자 변동 추이 그래프의 꺾인 점들을 만들었던 사람들, 디지털 전환률 1%를 높이기 위해 움직였던 사람들, 공정경쟁 확보 방안으로 바뀐 법률 한 줄에 생계가 걸린 사람들, 해피콜을 부탁하며 기억 속에 사라졌던 사람들, 가입 해지로 한바탕 싸웠던 바로 그 사람들 말이다. 자랑스러워서 아니다. 사기꾼 같은 회사를 고발한다며 목숨을 끊었고, 100명이 넘는 이들이 하루 아침에 해고를 당했으며, 어처구니 없는 임금 삭감을 감수하라 하기 때문이다.

▲ 씨앤앰 간접고용노동자 두 명은 12일 새벽 4시50분께 서울파이낸스센터와 프레스센터 사이에 있는 대형전광판 위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그런데도 누구도 묻지 않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란다. 정부 부처는 다른 부처의 일이라며 고개를 돌리고, 작업 지시를 내린 회사는 자기들이 사장이 아니라며 귀를 막는다. 학자들은 회사 매각 후 전망을 내놓으며 오지 않을 ‘공정경쟁’만을 외치고, 언론은 수 많은 파업과 사고 중 하나라며 입을 닫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이 있었다고, 사람이 여기 있다고 알리려 한다. 최신 유행의 스마트폰, 인터넷, IPTV를 팔던 고객센터의 직원은 손으로 쓴 유서를 남기고 떠나서야 거기에 자신이 있었다고 알릴 수 있었다. 자신이 팔았던 그 인터넷으로 사람들에게 유서가 읽혔다. 거실 TV 화면에서 방송이 나오게 만들었던 이들은 서울 중심가의 커다란 화면 위에 올라갔다. 당신이 편안한 소파에 기대어 보는 바로 그 TV 화면 뒤에 사람이 있다고 알리려는 듯 말이다.

지금 당신은 이 글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 책상 위 PC인가, 스마트폰인가? 아직도 그것이 물건으로만 보이는가? 당신이 쓰는 인터넷, 당신이 손에 든 휴대폰은 절대로 물건이 아니다. 사람이다. 묻지 않았어도, 알고 싶지 않다해도 그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부인하고 싶다면, 아래 영상을 보길 바란다. 당신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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