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를 감상하는 중에 요즘 뜨거운 감자인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떠올리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듯하다. 프랑스 하층민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가의 세금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백만 프랑이 넘는 목걸이를 사지 않겠다고 하는 극 중 시추에이션이, 양극화가 심화됨으로 중산층이 점점 멸종하는 요즘 시대 현상과 그리 무관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이 왕정과 귀족의 몰락을 초래한 건 루이 16세의 왕정이 평민과 하층민의 불만을 다독이지 못해 벌어진 일이다. 1막의 마그리드가 궁정에서 케이크를 악착같이 챙기는 건 그가 혼자 먹으려는 게 아니라 궁 밖에서 굶주리는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한 행동이었다.

▲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박정환
프랑스 사회에서 평민이 귀족으로 올라서는 신분의 상승이 불가능했던 것은 비단 앙투아네트 당시만의 일일까. 오늘날의 젊은이들 역시 경제적인 신분 상승을 바라고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 대학교를 다닌다. 하지만 졸업하고 나서는 학자금 마련을 위해 대출한 빚 몇천만 원을 떠안은 채 사회 초년생이 되지 않던가. 경제적인 신분 상승은 고사하고 부채 탕감에 20대의 청춘을 바쳐야 할 상황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상황이나 지금이나 사회적인 신분 혹은 경제적인 신분 상승은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계급 고착이 강화될 뿐이다. 경제적인 불평등이 완화되지 않고 지금처럼 가속화한다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프랑스 혁명처럼 대두될 것이 분명하다. 마리 앙투아네트 당시의 불평등이나 지금의 불평등의 가속화가 세월의 간극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탓에 피케티가 언급하는 자본론이 오버랩하는 것이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담론은 이쯤에서 정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로 돌아와 보자. 앞서 열린 프레스콜에서 한국 버전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른 나라 버전에 비해 왕비의 인간적인 면모, 역사적인 배경을 부각시키고 싶었다는 제작진의 이야기대로, 앙투아네트의 인간적인 면모는 왕실 코스프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1막보다는 2막에서 두드러진다. 왕비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체통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아이들과 떨어지지 않고자 발버둥치는 모습에서는 여성 관객의 손수건을 눈물로 적시는 데 성공한다.

▲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박정환
<마리 앙투아네트>가 <황태자 루돌프>만큼 왕비에게 정서적으로 감정이입할 가능성은 얼마만큼이나 될까. 루돌프의 개혁이라는 기치는 아버지에게 질식당함으로써 그의 불륜은 관객에게 동정표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센과 눈이 맞아야 하는 당위성은 <황태자 루돌프>과 비교해 볼 때 얼마만큼이나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하다.

하나 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건 귀족과 하층민의 체제 불평등을 왕정이 완화시키지 못해 일어난 사건이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하층민이 혁명에 동참하는 건 이들이 자신들의 체제 불평등을 자각해서가 아니라 돈 몇 푼을 벌기 위해서다. 불평등에 분노는 하지만 혁명에는 소극적이던 하층민이 혁명에 적극 동참하는 계기가 귀족이 던지는 돈 몇 푼 때문이라는 점은, 앙시엥 레짐이라는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프랑스 시민이 움직이게 된 동인이 시민 스스로의 개혁 의지가 아니라 귀족이 던져놓은 동전이라는 자본이라는 걸 의미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인간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의 동인을 자본으로 치환한 듯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 이유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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