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에는 일도 안 하고 놀고먹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회사도 직급도 이해관계도 제각각이지만 어지간한 직장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젊었을 때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며 회사에 기여한 바를 반백이 돼 누리는 것은 연공서열 사회인 한국의 ‘약속’이었지만 그 약속은 깨지고 있다. 누구나 ‘불필요한 사람’ 찾아내기에 바쁘다. “우리 회사에 월급도둑이 많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경영적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LG유플러스 직원은 20억, SK텔레콤은 40억, SK브로드밴드는 14억을 번다. KT 직원은 한 명이 1억을 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구조조정할 수밖에 없다.”

KT는 지난 4월 “1등이 되겠다”며 8300여 명의 직원을 내보냈다. 2002년 민영화를 앞두고 감원한 것까지 포함하면 그동안 총 3만7666명이 KT를 그만뒀다. 퇴직 이후 삶이 불투명한 한국사회에서 사표를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평균연봉 6400만 원을 받으며 회사에 1억 원 넘게 벌어다주던 KT 정규직은 그렇다면 왜 사표를 썼을까. 4월 있었던 ‘단일기업 최대규모 명예퇴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노조 활동 전력이 있는 문제적 인물과 쓸모없다고 판단한 퇴출 대상을 미리 선정하고 45일짜리 ‘학대해고’를 하는 이른바 CP(C-Player)프로그램을 전격 재가동하겠다고 흘린 것일까.

KT 직원들은 민영화 준비 단계부터 지금까지 괴롭힘을 가하거나, 당하거나, 목격했다. 굳이 직접 괴롭히지 않아도 직원들은 ‘몸으로’ 안다. KT 직원들은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혹시 KT 직원이세요?”라고 물을 정도로 회사가 무섭다. 민영화된 공기업 KT에는 ‘좋은 말로 나가라고 할 때 나가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느끼는 직원들이 있다. 4일 오후 ‘KT 사례로 보는 경영전략으로서의 직장 내 괴롭힘’ 조사·연구 프로젝트팀이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도 역시나 그랬다. 명예퇴직자들은 잔류 시 불이익이 두렵고 회사의 명예퇴직 압박에 스스로 사표를 냈다.

▲ (자료=KT 직장 내 괴롭힘 조사연구팀)

조사연구팀이 지난 8월 ‘4월 명예퇴직자’ 105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회사의 명예퇴직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3%(449명)가 ‘경영상 불가피한 조처’라고 대답했다. ‘필요하지만 과도한 조처’라는 응답자는 18%, ‘부당한 조처’는 27%, ‘잘 모르겠음’은 12%로 나타났다. 절반 가까이가 회사의 논리를 받아들인 조사결과다. 인권운동사랑방 명숙 활동가는 “쌍용차 정리해고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해고는 살인이다’이라 인식이 생겼지만 여전히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가 산다’는 생각이 많은 현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사가 명예퇴직을 진행한 과정과 퇴직을 결심한 이유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면 대부분 “괴로워서 제 발로 나왔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조사팀은 ‘KT에서 명예퇴직을 결정한 주요한 이유’(1, 2순위 선택)를 물었는데 1위는 “잔류 시 가해질 불이익 때문”(507명, 전체 응답자의 48%)이고 2위는 “노동조건이 악화되고 있어서”(364명)이고, 3위는 “명예퇴직을 신청하라는 압박을 견디기 어려워서”(241명)로 나타났다. “특별퇴직금 등 혜택 때문”이라는 사람은 203명으로 가장 적었다.

▲ (자료=KT 직장 내 괴롭힘 조사연구팀)

회사가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 방식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는 KT식 구조조정의 본질을 보여준다. “불이익이 우려되는 압박수준”이었다고 응답하는 사람이 48%(511명), “집요하게 강압하는 수준”이었다는 응답자는 27%(285명)로 나타났다. “권고하는 수준”(16%, 170명) 또는 “자발적 선택”(8%, 89명)이라는 의견은 소수였다. 특히 당시 KT노동조합은 명예퇴직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명예퇴직 과정에서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했는지’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90%(945명)는 “의견수렴 과정이 없었음”이라고 답한 것도 이 때문이다.

퇴직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불이익’이다. 사업권역이 전국인데다 사업내용도 ‘재벌’ 수준인 KT가 직원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기업보다 많다. 조사팀이 퇴직자에게 KT 내에 어떤 괴롭힘이 있느냐고 묻자(중복가능), 퇴직자 71%가 ‘원거리 발령’, 62%가 ‘노조 선거 개입’을 꼽았다. 회사가 석연찮은 이유로 서울에서 땅끝마을로 발령을 내도 노동조합은 문제제기를 않는 게 지금 KT다. 이밖에도 퇴직자들은 ‘잦은 직무변경’(46%), ‘모욕적인 언행’(19%), ‘사내메신저 감시’(18%), ‘집단 따돌림’(18%) 같은 괴롭힘이 있다고 응답했다.

▲ (자료=KT 직장 내 괴롭힘 조사연구팀)

KT의 ‘괴롭힘’은 널리 알려졌다. KT는 퇴직하지 않은 114 상담원을 저 멀리 울릉도로 보내고, 전주에 올라가야 하는 개통작업을 시키고,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해고했다. 특히, 내부고발과 소송과정에서 드러난 CP프로그램은 충격적이다. 회사가 생산한 CP프로그램 공식문서에는 45일 간의 ‘학대’ 매뉴얼이 있다. 회식 때 부르지 말고 소외감을 유발하라는 전술도 있다. 퇴직을 거부했거나 노동조합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는 직원들이 CP명단에 올랐고, 다들 ‘살아남기 위해’ 프로그램에 동참했다. KT 퇴직자 설문조사 결과는 자신이 했거나 목격한 일에 대한 ‘고백’에 가깝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KT의 한 고위관계자는 <미디어스>와 만난 자리에서 누차 “만 명 수준까지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 출신 황창규 회장은 단일기업 최대규모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그리고 퇴직거부자들을 정체 모를 부서(Cross Function Team)에 모았다. CFT 소속 KT 정규직이 하는 일은 하루 3시간 ‘돌아다니며 사진 찍기’다. 기술자들에게 “가서 사진이나 찍어오라”고 지시하는 일은 114 상담원에게 “전주를 타라”는 것과 같다. “좋은 말로 할 때 나가라”는 이야기다.

KT 같은 기업은 외국에서 살아남기는 힘들 정도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김동현 변호사에 따르면, 스웨덴 핀란드 캐나다는 노동법과 산업안전보건법 등에 ‘직장 내 괴롭힘’을 규정하고 이에 대한 구제조치를 마련했다.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세르비아에도 ‘직장 내 괴롭힘’만을 따로 규율하는 법이 있다. 일본의 경우 법률은 없지만 일본 후생노동성은 ‘직장 내 파워하라스먼트(power harassment)’를 대대적으로 조사했고, 근로기준감독서 고시로 300인 이상 사업장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을 관리감독하고 있다.

▲ (사진=미디어스)

조사팀은 한국에서도 ‘경영전략으로서 직장 내 괴롭힘’을 규제하고 관리감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산인권센터 안은정 활동가는 “직장 내 괴롭힘은 노동통제와 구조조정, 존엄성 훼손 수단으로 사용되는데 노동자의 권리를 세분화하고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사회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며 “이를 기업을 평가하는 척도로 삼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감시하고 평가하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노동연구원 박제성 연구원은 “2002년 산업안전보건법에 ‘정신적 스트레스’ 개념이 들어왔지만 여전히 한국의 노동법은 ‘신체건강’에 초점을 두고 정신건강을 등한시하고 있다”며 “경영방식으로서 직장 내 괴롭힘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산안법뿐만 아니라 근로기준법과 취업규칙에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권운동사랑방 명숙 활동가는 “경제위기로 금융권에 구조조정 바람이 불 때 다들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얘기했지만 이 말에는 절반의 진실만 있다”며 “불필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기업은 대부분 퇴직한 자리를 ‘외주화’했고, 값싼 비정규직으로 채웠다. 이런 문화를 바꾸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데 오늘 보고대회에 고용노동부를 섭외하려 했더니 답은 ‘담당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처럼 원탁회의를 구성하고 조직해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이미지=KT 직장 내 괴롭힘 조사연구팀)

KT해고자로 KT새노조 대변인을 맡고 있는 이해관씨는 “민영화 전 KT는 독점기업이었는데 IT기술이 폭발한 시점에 경쟁구도에 들어갔고, 과거 기술자가 80%이던 KT는 이제 영업인력이 80%인 회사가 됐다. 통신업계가 변한 탓이다. 40대 후반과 50대들은 이제 KT에서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됐다”며 “KT의 괴롭힘 문제는 근본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진 노동자를 이 사회가 어떻게 받아안을지에 대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해관씨는 “돈 잘 버는 회사는 경쟁력이 떨어진 직원에게 ‘너희는 쓸모없다’며 내보낸다. KT의 경우 ‘너희는 필요없다’며 노골적으로 얘기한다. 프랑스 같으면 연금생활이 가능해서 ‘정년단축’을 요구하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회사가 CFT 같은 것을 만들어 직원을 괴롭힌다’고 하지만 회사는 ‘우리가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노력한다’고 한다. 노동조합이 저항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선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림대 신경아 교수(사회학과)는 “50대가 되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데 이를 쓸모없다고 볼 것이 아니다. 한국은 ‘근속하면 당신이 회사에 기여한 것을 보장’하는 연공서열 사회인데, KT의 경우, 노동시장의 기본원칙과 약속을 깬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남신 소장은 “오늘날 KT를 있게 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감시하고 따돌리고 퇴출하려고 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경영”이라며 “KT는 연이은 과로사와 돌연사로 ‘죽음의 기업’이라는 오명이 있을 정도”라고 지적했다.

한편 KT는 조사결과의 신뢰성이 떨어지고 명예퇴직은 자발적으로 신청한 것이라며 조사팀 주장을 반박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KT는 “회사가 일부 직원들에게 불이익을 가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제시된 설문조사는 소규모를 대상으로 했을 뿐 아니라 검사 방식이 적절하지 않아 결과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며 “명예퇴직은 사업합리화와 대규모 조직개편의 하나로 당사자의 자발적 신청에 따라 이뤄졌다. CFT 역시 현장 생산성 향상을 위해 신설된 정규조직으로 직원 퇴출을 위한 부서라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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