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뜨겁다. 새누리당 내 친박계 인사들에 의해 차기 대권주자로 언급된 이후 새정치민주연합의 권노갑 고문이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다시 반기문 총장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권노갑 고문은 3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자신의 회고록 ‘순명’ 출판기념회에 앞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반기문 총장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새정치민주연합 대선후보로 반기문 총장이 나왔으면 한다는 의사를 타진했다”면서 “반기문 총장을 존경한다, 그만한 훌륭한 분이 없다는 대답을 했다”고 밝혔다. 권노갑 고문은 자신에게 대선 출마 의사를 피력한 사람들이 반기문 총장의 꽤 가까운 측근들이라면서 이와 같이 밝혔다.

4일 주요 일간지들은 이와 같은 소식을 어느 정도의 비중을 두고 다뤘다. 특히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열린 ‘국가경쟁력강화포럼’에서 열린 세미나 자리에 초청된 리얼미터 이택수 대표가 반기문 총장의 대권 도전 가능성과 등을 언급한 것과 이 사건을 엮어 보도한 경우가 많았다. 반기문 총장이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양쪽에서 ‘러브콜’을 받는 상황이 말하자면 ‘스토리’가 되기 때문이다.

▲ 반기문 UN 사무총장. (연합뉴스)

하지만 특이하게도 <조선일보>의 경우는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조선일보>는 이날 이와 같은 소식을 보도하면서 기사 제목을 <이번엔 野서 반기문 영입說…潘측 “기가 막혀”>로 뽑았다. 권노갑 고문의 출판기념회 소식을 보도하면서 반기문 총장 측 반응을 강조한 기사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서 반기문 총장 측의 “기가 막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했다는지 오히려 묻고 싶다”, “왜 자꾸 반기문 총장을 흔들어 대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정치권과 가까운 전직 외교관 몇이 반기문 총장을 ‘팔고’ 다닌다”는 발언 등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사설로 가면 <조선일보>의 목소리는 더 분명해진다. <조선일보>는 이 날 <반기문 영입하자는 정치권, 부끄럽지도 않은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배치했다. 이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정치권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하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 사회 전 분야가 꽉 막힌 듯한 오늘의 현실을 타개할 것인가이다”라며 정론을 폈다. <조선일보>의 이어지는 주장은 한국 정당정치에 대한 처절한 비판이다. <조선일보>는 “새정치연합은 선거 때만 되면 여기저기서 단발성으로 사람을 꿔다 쓰는 ‘차입(借入) 정치’에 이골이 난 정당”이라면서 “이제 여당마저 인재를 키우고 정책을 다듬으며 스스로 강해질 생각은 하지 않고 야당의 이런 행태를 닮아가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조선일보>가 새삼스럽게 한국 정당정치에 대한 미래를 걱정해 이런 주장을 내놨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다음 대선 까지는 3년 이상의 긴 시간이 남았다”면서 “아무리 다음 대선 후보 얘기를 해봐야 의미도 없다”고 지적했다. 세속의 말로 풀어서 쓰자면 지금 불과 집권 2년차에 대통령의 편에 서있다고들 하는 ‘친박’들이 벌써부터 차기대권주자를 입에 올리며 대통령을 흔들어서야 되겠느냐는 소리다.

하지만 ‘친박’들의 입장에선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당 대표 자리를 ‘비주류’ 출신인 김무성 대표에게 빼앗긴 이후 이렇다 할 차기 대권주자를 가시화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 바 ‘비박’들은 김무성, 김문수, 정몽준, 홍준표 등 자천 타천으로 대권 도전을 은근히 입에 올리는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보유하고 있건만 친박에는 그런 인물이 단 한 사람도 없으니 그야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를 중심으로 판이 짜여지고, 당의 권력이 이동하고, 공천권이 이동하는 건 정해진 수순인데 아직도 이런 판국이니, 어쩔 수 없이 친박들은 대통령이 2015년 예산안 시정연설을 국회에서 직접 한 직후에 참으로 불충하게도 국회 한 구석에 모여서들 반기문 총장의 대선 출마 가능성이나 저울질 해볼 수 없는 팔자로 전락한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과 반기문 UN 사무총장. (연합뉴스)

답답한 건 새정치민주연합 내의 ‘비노’들도 마찬가지다. 권노갑 고문은 ‘동교동계’로 과거부터 ‘친노그룹’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오지 못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새정치민주연합내 친노그룹의 경우 문재인 의원이나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같은 인물들을 차기 대권주자로 보유하고 있고 비록 친노그룹으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박원순 서울시장과 같은 인물들도 ‘성향’에 있어서는 서로 납득할만한 공통분모를 일부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비노’들의 경우를 보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안철수 의원은 대표를 맡은 이후 상당한 상처를 입었고 손학규 고문은 정계를 떠나버렸으며 나머지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하나마나다.

<조선일보>가 묘사하는 것처럼 유력인사의 주변그룹들이 정치권 언저리를 돌아다니며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이런 저런 정치적 전망을 팔고 다니는 건 흔한 일이다. 반기문 총장이 충청 출신이라는 것은 이러한 ‘전망’의 개연성을 증대시켜주는 요소다. 야당과 결합하면 신 DJP연합이 되고 여당과 결합하면 신뢰와 원칙의 박근혜 만세론이 된다. 정치인들은 반기문 대망론이 지금 상황에선 실체가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신문과 라디오에 이름 석자라도 싣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정치라면 이골이 났을 권노갑 고문의 ‘발언’ 역시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 박원순 서울시장과 반기문 UN 사무총장. (연합뉴스)

여론조사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반기문 총장에 대한 지지는 전형적인 정치적 냉소주의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기성 정치에 대한 불만을 그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유능한 인물에 지지를 표명하는 것으로 대신 표현한다. 이러한 냉소적 지지는 그 수혜자가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어쨌거나 실체를 가진 정치적 세력으로 귀결되기도 하고 마치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의 ‘맥거핀’처럼 시선을 끄는 존재감만을 남긴 채 소리없이 무너져 버리기도 한다. 전자의 예가 2012년 대선 출마 이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안철수 의원이고 후자의 예가 2006년 상당한 지지를 얻었음에도 낙마한 고건 전 국무총리일 것이다.

물론 반기문 총장이 두 가지 길 중 어떤 길을 갈지 지금 예측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UN사무총장이란 자리까지 올라간 칠십노인이 3년 후 대선에 출마하는 그런 ‘노익장’을 과시하리라는 추측을 선뜻 해보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굳이 <조선일보>의 사설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정치권이 제 할 일을 제대로 하고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정치적 냉소주의를 돌파하기 위한 근본적 시도를 반복한다면 ‘반기문 대망론’이 설 자리가 없으리라고 말하는 건 무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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