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 전부터 <보이첵>이 화제몰이를 했던 이유는 충분했다. 단기간도 아닌 8년이라는 긴 준비 기간, 김다현이 그가 연기하는 보이첵마냥 실제로 완두콩을 먹으며 바싹 야위어가는 모습은 이슈몰이를 하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마치 김명민이 <내 사랑 내 곁에>를 연기하기 위해 바싹 말라가던 것처럼 우리의 ‘꽃다현’은 측은하게 생각될 정도로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세계에서 <보이첵>을 뮤지컬로 만든 사례가 전무한 만큼, 인간소외를 극대화한 게오르그 뷔히너의 작품이 뮤지컬로 만들어진다는 기대 또한 컸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본 <보이첵>은 ‘소문 난 잔칫상에 먹을 것 없다’는 옛 말이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실감나게 만들었다. 우선 뮤지컬과 연극의 차이점에 대해 짚어보아야겠다. 연극은 객석에 날 것 그대로를 전달하는 장르다. 요즘에야 로맨틱 코미디라는 ‘판타지’가 대학로를 뒤덮은 지 오래지만, 예전에 대학로를 평정했던 건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정극 아니던가.

말 그대로 정극은 로맨틱 코미디라는 달달한 사랑의 판타지를 객석에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리얼리티를 배우가 객석에 얼마만큼 리얼하게 전달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작품의 메시지를 판타지로 포장하기 보다는 대사와 몸짓 언어를 통해 날 것 그대로인 리얼리티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 뮤지컬 '보이첵', 사진제공 LG아트센터
하지만 뮤지컬은 다르다. <엘리자벳>이나 <황태자 루돌프>, <미스 사이공> 같은 비극이라 할지라도 관객이 극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에는 연극과 같은 리얼리티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판타지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뮤지컬만의 장점이자 무기인 음악, 넘버의 힘이다.

예를 들어보자. 잔혹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 시어머니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성병이 옮아버린 며느리 엘리자벳의 ‘시월드 잔혹사’를 연극처럼 날 것 그대로의 대사로 옮겨버린다면 관객은 몸서리 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벳>을 보는 관객이 몸서리치지 않는 것은 대사가 전달하는 저력보다 넘버, 노래가 전달하는 파급력이 크기 때문이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두드리는 노래의 저력 덕분에 뮤지컬은 날 것 그대로의 연극보다 판타지로 객석의 귓가를 울리게 되는 것이다.

다시 <보이첵>으로 돌아와서 살펴보자. <보이첵>은 감수성이라는 효율성을 넘버 안에 담는 점에 있어서는 합격점이다. 이는 영국 언더그라운드 밴드 싱잉로인즈가 빚어낸 넘버 덕인데, 1막 ‘갈대의 노래’ 같은 경우에는 갓 사랑에 빠진 연인의 귓가에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마냥 인터미션 내내 귓가에서 맴돌았다.

▲ 뮤지컬 '보이첵', 사진제공 LG아트센터
하지만 <보이첵>은 이런 훌륭한 넘버를 가졌다는 장점을 잠식해버리고 만 뮤지컬이라고 평가해야 할 듯하다. <보이첵>은 뮤지컬의 장점인 넘버와 넘버 사이에 연극적인 요소가 많이 삽입된다. 하지만 이 연극적인 요소를 보여주는 가운데서 넘버의 감미로운 정서가 상쇄하고 만다.

왜 그럴까? ‘유전자의 숙주’라는 종족 번식의 본능을 인간도 피해갈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축제 가운데서 말이 소변을 보는 장면, 보이첵이 전기 충격을 받는 장면 가운데서 여성 앙상블 중 한 명이 보이첵의 중요 부위를 만지는 장면과 같은 자극적인 요소가 다채로운 넘버를 부식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기 때문이다. 만일 보이첵을 연기한 배우가 남자 배우가 아닌 여자 배우였다면 성희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테다.

관객은 뮤지컬 가운데서 판타지를 바라는 것이지 연극적인 리얼리티가 아니다. 한데 <보이첵>은 뮤지컬이 제공할 수 있는 판타지보다는 리얼리티에 충실한 나머지 <보이첵>의 최대 강점인 감미로운 넘버를 상쇄하고 말았다. 연극적인 연출을 세련되게 가다듬을 때에야 영국에서 공연할 때 넘버가 제공하는 판타지의 강점을 최대한 살릴 듯싶은 뮤지컬이 <보이첵>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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