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의 상(喪)은 국장(國葬)급으로 손색이 없었다. 어려서 봤던 육영수나 박정희의 장례보다 여러모로 차고 넘쳤다. 케이블 TV 연예 채널은 그녀의 삼일장을 2박3일 동안 생중계했으며, 재방도 모자라 재재방까지 했다. 인터넷 연예 전문 매체에 뒤질세라, 조·중·동의 닷컴들도 경찰보다 몇발 앞선 민완(敏腕) 저널리즘의 질펀한 정수를 보여줬다. 모든 진행자들과 출연자들은 말끝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그들의 진정성은, 믿을 재간이 없는 만큼 믿지 못할 재간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조사(弔詞)가 망자의 몫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몫인 것만큼은 확연해 보였다.

망자만을 위한 상장례(喪葬禮)란 없는 법이다. 상장례는 본디 망자의 ‘떠나는’ 행위 절차가 아니라 남은 자의 ‘보내는’ 행위 절차다. 아무리 지고지순한 사랑을 나눈 사이더라도 이런 원론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숭고함으로 앞단장한 이 의식의 뒤안길은 대개 적나라하다. 상갓집 고스톱 판은 개중 가장 고졸한 ‘미풍양속’이다. 규모가 큰 상장례일수록 죽음은 병풍 뒤로 멀리 밀려나고 일상의 삶이 넓게 자리를 편다. 죽은 정승보다 산 정승의 죽은 개가 문상객을 더 많이 불러 모으는 인심의 이치다. 난 보상금이 낀 대형 재난사고 현장을 취재하면서, 울부짖는 이 가운데 희생자의 직계가 아닌 경우를 허다하게 봐왔다.

최진실의 죽음을 국상 버금가게 치르도록 한 언론들은, 그 순간 언론이라기보다는 이 판에 한몫 단단히 노리는 셈빠른 장례업자들이었다. 곡소리의 높이는 문상객의 머릿수, 나아가 수익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이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은 총동원되고, ‘사출’된 슬픔은 차곡차곡 (혹는 벼락같이) 돈으로 환원돼 쌓인다. 최진실의 죽음에서 뽑아 먹을 수 있는 것이 남아있는 한, 이들은 앞으로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상업적 애도’를 계속할 것이다. 두고 볼 일이다. 이들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증권가 찌라시에 숨은 ‘최진실’ 이름 석 자를 다시 찾아 헤맬는지는.

그러나 ‘상업적 애도’를 당장 이어받은 것은 ‘정치적 애도’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한나라당은 그녀의 이름 석 자를 딴 법률 이름을 헌사하겠다고 나섰다. 여론의 역풍을 맞자 유인촌 문화부 장관이 법률 이름에 그녀의 이름을 담지 않겠다고 한발 물러섰지만, 그건 객쩍은 흰소리일 뿐이다. 그가 이 법률의 주무장관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그녀의 이름을 담든 담지 않든, 설령 문제의 법을 ‘국민 여배우법’이라고 이름 붙인들, 그녀의 죽음을 매개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꼼수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이 법의 본질은 인류가 ‘발명’한 상장례 가운데 최악인 ‘순장(殉葬)’을 닮았다.

순장 제도는 남은 자를 위해 죽은 자뿐 아니라 산 자의 삶까지 송두리째 갖다 바치는 제도화된 학살이다. 남은 자의 권력은 죽은 권력자의 명복이라는 허구의 명분과 산 자의 무구한 실존적 희생에 의해 유지된다. 소설가 김훈의 <현의 노래>에는 왕의 지밀시녀 아라가 순장을 피해 야반도주하는 애달픈 삶이 묘사되어 있으나, 지은이가 그리는 당대의 세상은 특정한 야만(순장)이 만연한 야만(전쟁과 살육)의 일부를 구성할 뿐이다. 그로 인해 지은이의 문장은 삼엄하게 절제될 수밖에 없다. 그로부터 1500년이 흐른 오늘, 최진실은 영면을 허락받지 못한 채 권력에 불려나오고, 그녀를 추념한다는 명분은 제도화된 희생을 예고하고 있다.

최진실의 죽음과 유일한 인과관계에 놓이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고, 나는 본다. 그녀의 죽음은 자기본위적 자살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타살이며, 그녀 삶의 관계방식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녀는 언론과 대중에 의해 상징권력이 되었고, 그 언론과 대중에 의해 소비되었으며, 죽음에 이르는 데도 다시 그 언론과 대중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죽음 뒤에도 그 질긴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녀의 죽음은 그렇게 남은 자들의 삶 앞에 펼쳐져 있지만, 대중 가운데 일부(악플러)는 살인범이 되고, 대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사마리아인이 되었으며, 누군가는 정의의 심판자를 자처하고 있다.

“누구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저 여인을 돌로 치라”는 말씀은 가슴에 깊이 와 닿지만, 그 말씀은 누군가에게 자의적으로 악용될 여지가 큰 게 현실이다. 죄 있는 자와 죄 없는 자는 ‘힘’을 경계로 갈린다. 정부여당은 일부 악플러를 발본색원하고,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누리꾼들을 잠재적 악플러로 규정해 처벌을 목적으로 감시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최진실과 관련한 악소문을 의제화하고 그녀의 상장례를 국장급으로 치르게 해 이득을 챙긴 일부 언론은 이제 발빠르게 변신해 정부여당의 대변인 노릇을 하며 순장을 치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최진실의 유택이 세상 전체를 덮을 기세다. 그건 암흑이 만연한 여론의 야만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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