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잠들기 전에>에서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크리스틴은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습니다. 사고를 당한 바람에 특정 시점 이후로는 전혀 기억을 못 하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일도 다음날이 되면 까맣게 잊습니다. 즉 <첫 키스만 50번째>의 루시와 동일한 증상이라서 매일 낯설고 새로운 삶을 반복합니다. 아침에는 어김없이 모르는 남자 옆에서 깨지만 곧 벽에 붙은 사진을 보면서 그가 남편인 벤이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잠시 후에는 자신을 치료 중이라고 하는 정신과 의사로부터 전화를 받습니다. 그는 크리스틴에게 매일 동영상 일기를 찍으라고 했으니 그걸 보면 자초지종을 알 수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기억상실증이 소재라는 점에서 <내가 잠들기 전에>가 스릴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편과 찍은 사진이나 셀프 카메라로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에서는 <메멘토>까지 길이 이어집니다. 레너드처럼 크리스틴도 기억상실증 때문에 전적으로 기록용 사물과 타인에 의지하여 매일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습니다. 이 기억 아닌 '정보'는 남편이라고 하는 벤과 정신과 의사라고 하는 마이크에게서 각각 나오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서 크리스틴은 진짜 내가 누구고 벤과 마이크는 또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여기에 크리스틴이 기억을 잃게 된 사고까지 흐리멍텅하게 삽입하는데, 마지막까지 <내가 잠들기 전에>가 극의 중심을 잡고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 게 바로 이것입니다.

결국 이 영화가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하는 부분은 크리스틴이 '숨겨진 하나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벤과 마이크의 발언이 조금씩 어긋나는 지점부터 이것이 수면 위로 부상합니다. 이때부터 벌어지는 일은 과연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으며 누가 위험한 사람인지를 가려야 하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내가 잠들기 전에>는 기억상실증이라는 소재를 가지고도 긴장을 전혀 파생시키질 못 합니다. 긴장은커녕 소재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이 탓에 베일을 드리운 것처럼 내보인 크리스틴과 두 인물의 관계에다가 과거의 사고까지 워낙 느슨하게 엮여서 제각기 따로 부유하고 있습니다.

인물의 심리 묘사도 형편없고 개연성은 거의 싸그리 무시한 채 이야기를 전진시키기에만 급급합니다. 예컨대 <내가 잠들기 전에>을 연출한 로완 조페는 낯선 남자의 옆에서 눈을 뜨고 욕실로 걸어 들어가 사진을 보는 크리스틴의 불안과 충격은 영화에서 아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다룹니다. 이윽고 또 다른 낯선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그의 지시를 따르는 과정도 다를 바 없습니다. 마치 크리스틴은 모든 걸 기억하는 사람처럼 고분고분합니다. 설상가상 둘 중 한 남자가 위험인물이라고 의심하여 발버둥쳤던 것도 금세 사라지고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다시 대화하고 만납니다. 크리스틴이 벤을 의심하는 이유와 더불어 기억상실증인 와중에 굳이 남편 몰래 정신과 의사를 만났다는 것도 석연치 않습니다.

원작소설을 가진 <내가 잠들기 전에>가 각색과 연출에서 실패했다는 건 결말에 이르러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감히 단언컨대 로완 조페는 마지막에 최악이자 안이하기 짝이 없는 수를 뒀습니다. 소재를 오롯이 활용하지 못해서 긴장을 전하지 못하던 영화가 부랴부랴 결말을 맺으려고 황급하게 얼버무린 꼴이었습니다. 이런 걸 두고 속된 말로 '감성팔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나를 찾아줘>와 <내가 잠들기 전에>를 비교하면 스릴러에서 인물을 다루는 솜씨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배우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그 인물과 심리를 표출시키 못하면 무용지물이란 걸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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