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우리나라처럼 욕이 다양하고 때로는 심한 곳도 없을 것이다. 별의 별 것들이 온통 욕에 동원된다. 인류의 가장 오랜 반려동물이라는 강아지조차도 이 욕의 대단히 큰 지분을 차지할 정도면 말 다했다. 그렇지만 욕이 아닌 ‘좀’ ‘많이’까지도 욕이 될 줄을 꿈에도 생각 못했다. 현실이라면 몰라도, 아무리 케이블이라도 티비 드라마이기에 방심했던 허를 제대로 찔렸던 것이다.

오과장은 자원팀 정과장과 트러블이 생겼다. 예전 업무협조에 반드시 첨부되어야 할 BL(탁송화물증권)원본이 사라진 것이다. 워낙 성격이 불같은 자원팀 오부장의 기세에 눌려 정과장은 제대로 설명을 못하고 임기응변으로 오과장 탓으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작년에 오부장의 여사원 성희롱 문제가 불거졌을 때 오과장이 증인이 섰다는 이유로 앙심을 품고 있었던 오부장은 개인의 분풀이를 할 좋은 기회로 생각해버릴 것을 정과장은 미처 몰랐던 것이 사단이었다.

오부장은 오과장에게 따지라고 정과장을 닦달했고, 마지못해 영업3팀으로 향한 정과장은 난처했지만 부장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오과장에게 왔다가 그만 거짓이 진심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차마 말해선 안 될 말까지 나오고 오과장은 정과장에게 주먹을 날리게 됐다. 이제는 BL이 문제가 아니었다. 폭력을 행사한 오과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됐다. 결국 오부장은 오과장에게 공식 사과문을 사내 인트라넷에 올릴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어길 시 정식으로 문제 삼겠다고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결국 오과장은 사과문을 올리겠다고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오과장은 태연한 가운데, 오과장의 사과문을 본 직원들은 아연실색했다. 특히 김대리는 좌불안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과장이 올린 사과문은 “미안하다 좀 많이”가 전부였고, 뭔가 조롱하는 듯한 사과 애니메이션이 첨부된 것이다. 문제는 사과문이었다. 문장 그대로 해석하면 다소 성의 없이 미안하다고 하는 것 같지만, 이 문장은 한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욕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 그 사과문을 보는 순간 빵 터지고 말았다. 역시 오과장이라는 감탄이다. 오과장이 당하는 과정을 보면서 부글부글 끓던 속이 이 사과문을 보는 순간 확 뚫리는 기분이었다. 딱히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회사 혹은 특정 집단 내에서 억울한 상황을 겪었던 모든 사람들이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욕설이라는 것이 대부분 좋지 못하지만 이럴 때는 구구절절 긴 말보다는 이런 짧고 굵은 욕설 한 마디가 백번 낫다. 욕설의 미학, 욕설의 카타르시스다.

그런데 그 와중에 또 다른 일이 조용히 전개되고 있었다. 자원팀과 영업팀에서 한 판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자원팀 신입사원 안영이는 남들의 시선을 피해 캐비넷을 뒤져 문제의 그 BL을 찾아내고 만 것이다. 자기 팀 정과장을 의심했었기 때문에 캐비넷을 뒤졌던 안영이지만 어쩌면 그 BL이 없기를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정과장도 그렇지만 사건이 있던 때에 인턴으로 일하던 장백기 태도 역시 수상한지라 안영이로서는 진실을 그저 묻어둘 수는 없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BL을 캐비넷에서 확인하고 만 것이다.

이 BL은 개인의 양심문제로 바뀌었다. 인턴 때와 달리 찬밥신세에 여성차별에 시달리고 있는 안영이는 고민에 빠졌다. 그 문제를 밝히게 된다면 가뜩이나 좁은 자원팀 내의 입지가 더욱 사나워질 것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선차장을 돕다가 조언을 구하게 된다. 선차장은 “옳은 일을 모른 척 하면 버티기가 좀 쉬워지나?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남녀가 상관 있나?”라는 반문으로 대답한다. 결정은 결국 본인의 몫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안영이는 사실을 밝히기로 결정했고, 장그래를 찾아가 자원팀 캐비넷 비밀번호를 알려주면서 차마 자신이 직접 건네지는 못하겠다고 말한다. 아주 속 시원한 해결은 아니지만 신입사원으로 큰 용기를 낸 것이다. 그러나 장그래는 불 꺼진 사무실에서 캐비넷을 뒤지다가 그만 정과장에게 들키고 만다. 그때 정과장에게 멱살을 잡힌 채 끌려가는 장그래 앞에 오과장이 등장한다. 그의 손에는 BL이 들려있었다. 이제 전세역전이다.

오과장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끝내 지시를 어기고 자신을 위해 자원팀 캐비넷을 뒤지다가 봉변을 당한 장그래에게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런 다음날 아침 오과장은 집을 나서다가 아파트 문이 열리지 않아 당황했다. 문밖을 살피니 거기에 장그래가 침을 흘리면서 잠들어 있었다. 술에 취한 오과장을 집까지 무사히 들여보내고 장그래는 그만 그 자리서 골아떨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장그래는 또 한 발, 혼자가 아닌 모두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어쩌면 오과장을 닮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생 5회에는 오과장의 기억에 오래 남을 사과문과 함께 선차장과 안영이를 중심으로 회사라는 조직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편견과 차별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서 다소 소극적이지만 진지하게 다뤘다. 특히 워킹맘들이 겪는 이중고를 조명해 완곡하게나마 우리사회의 변화를 종용하는 의지를 보였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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