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근(설경구 분)은 후배들에게조차 배역을 빼앗기는 실력 없는 무명 배우다. 하지만 입이 무거울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지도자에게 리허설용 배우로 발탁된다. 성근의 배역은 바로 김일성. 김일성의 ‘김’ 자도 못 본 그는 연기론을 가르치는 교수와 주사파 학생에게 김일성의 사상과 몸짓, 사고방식을 체득하며 자기 자신보다 김일성의 모습과 가까워지게 된다.

어떻게 보면 성근의 자의식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만큼 옅은 게 아니었나 생각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성근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신이 김일성이라고 믿게 만드는 건 그가 메소드 연기에 천착해서가 아니라, 무대에서 못다 이룬 연기의 한을 이번 리허설용 배우로 갚겠다는 성근 본인의 의지와 연관된다.

하지만 성근이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성근으로 하여금 김일성의 하나부터 열까지를 모두 배우고, 습득하고, 체화하라고 강요한 군사정권의 파시즘’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김일성과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뻔한 시대는 다름 아닌 폭압의 시대였다. 꼭 그 당시만 하니라 해도, 1980년대 아니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안기부 담장 안으로 넘어간 공을 찾으러 대학생이 안기부 담장을 넘었다가 불구가 되어서 돌아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 때니 1970년대야 오죽했겠는가.

나는 새도 당시 지도자의 말 한 마디에 떨어지던 때였으니 성근이 김일성 대역을 연습하는 분위기 역시 평화롭게 남북정상회담용 리허설을 준비하는 게 아니었다. 성근을 가르치는 주사파 학생에게는 따귀 세례가 작렬하고, 마지막 성근이 김일성의 대역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지원자들이 각목으로 구타를 당해야 했던가.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김일성 역할이 체화된 것이 아니라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런 가운데서 김일성이라는 정체성이 성근에게 부여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성근이 고유한 정체성을 망각하고 자신이 김일성이라고 착각하는 건 그에게 타인의 정체성을 부여하게 만든 것이 자율이 아닌 타율이라는 점 말이다. 그 타율성은 파시즘이 낳은 폐해다.

성근이 ‘일회용’ 배우라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근은 한 번 공연하고 나서는 지속적으로 김일성을 연기할 수 없다. 딱 한 번 국가정상 앞에서 연기한 다음에는 성근의 김일성 역할은 용도폐기된다. 성근이 딱 한 번만 연기해야 함에도 그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김일성의 정체성을 덧입었다는 건, 군사독재 정권의 폭력이 얼마만큼 강렬한가를 알 수 있게 하며 동시에 일회용 인생의 비애를 보여준다.

마치 단 한 번의 교미를 마치고는 암컷에게 머리를 물어 뜯겨 죽음에 다다르는 사마귀 수컷처럼, 성근은 정상회담을 위한 일회성 역할을 위해 자신의 모든 연기를 다 바친다. 일회용 연기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걸 다 바친 성근의 모습 가운데서 사마귀 수컷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건 성근과 사마귀 수컷 모두 일회용 삶이기에 그렇다. 한 번 사용하고 나면 죽거나 용도 폐기되는 일회용 삶의 비애를 성근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건 어렵지 않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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