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에 걸쳐 세 편의 긴 연설문이 한국 사회에 공개되었다. 29일 국회에서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 30일 같은 곳에서 발표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이 그것이다.

‘글’이란 관점에서 보면 세 연설문은 모두 훌륭하게 쓰여졌다고 평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세계와 맞추어 본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은 세계 각국의 현실을 호도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장의 연설은 간만에 의석 130석 제1야당의 위상에 걸맞는 현실인식과 기품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박근혜와 김무성의 연설의 ‘훌륭함’은 ‘교묘함’에서 나오는 것으로, 문희상 연설의 ‘훌륭함’은 ‘신중함’에서 나오는 것으로 평할 수 있다.
박 대통령 시정연설, 한국 사회 현실 호도하다
‘골든타임’이란 단어는 세월호 참사 이후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 시정연설문엔 ‘골든타임’은 있는데 ‘세월호’는 없다. 차라리 ‘골든타임’이란 말을 넣지나 말든지, 이건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세월호 참사 유족들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외면하고 떠난 대통령은, 마치 언론이 그 장면을 보도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저와 정부는 지난 1년 동안 4대 국정기조를 중심으로 국가 혁신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 왔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그 결과 우리 경제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성장률은 작년 3.0%에서 올해는 3% 중반대로 개선될 것으로 보이고, 일자리도 꾸준히 늘어나서 고용률도 작년 64%대에서 올해는 65%대로 올라설 전망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대로라면 분명히 한국 사회는 나아지고 있다는 것인데,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여기에 동의할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자들조차 이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그들은 한국 사회가 나아지지 않는 것은 박 대통령의 책임이 아니라 그녀의 위대한 시책들을 방해하는 못된 의회정치 세력의 탓이라고 여기겠지만 말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국회에서 새해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에서도 한국 사회가 처한 위기 상황이 곳곳에 드러난다. 박 대통령은 “지금 우리 경제는 여전히 위기”라면서, “한은이 지난 주 발표한 3분기 GDP 성장을 보면 제조업 생산이 0.9%가 줄고 수출마저 큰 폭으로 감소했으며 8월 설비투자는 11년 7개월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라고 설명한다.
이어서 박 대통령은 “지금 우리 경제는 저성장, 저물가, 엔저라는 신3저의 도전으로 기업의 경쟁력이 크게 약화되고 있고, 미국의 조기 금리인상 가능성 등 세계경제의 불확실성도 심화되고 있다”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로 2017년부터는 일할 수 있는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게 되고, 성장잠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예의 ‘골든타임’이 등장한다. 박 대통령은, “지금이야말로 우리 경제가 도약하느냐, 정체하느냐의 갈림길에서 경제를 다시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지금이 바로 국회와 정부, 국민과 기업 등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 경제살리기에 총력을 다해야 할 때다”라고 호소한다.
이어서 박 대통령은 재정적자를 늘려서라도 경기활성화를 해야 하며, 공공부문을 개혁해야 하고, 공무원연금도 손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복지를 늘려가고 있으며 창조경제가 잘 되고 있다는 자화자찬도 잊지 않는다.
문장은 유려하다. 말은 좋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국가는 대책없이 빚을 늘려나가는 중이며, 빚을 줄이기 위해 돈 되는 건 다 팔아치우려고 든다. 복지예산은 노년인구가 늘어나 어쩔 수 없이 늘어나지만 사각지대는 점점 더 넓어지는 중이다. 이 연설문이 호도한 한국 사회의 현실은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장의 연설문을 봐야 밝혀진다.
김무성 대표 연설, 세계경제의 모습 왜곡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연설문은 박근혜 대통령의 것보다도 낫다. ‘경제’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정치’ 영역을 무시하며 ‘세월호’에 대해선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대통령과 다르다. 이것이 단임제 국가에서 ‘현임 대통령’과 ‘후임 대통령을 꿈꾸는 자’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김무성 대표는 연설문 서두에서 “대한민국은 올해 세월호 참사라는 너무나 큰 슬픔과 충격을 겪었다. 급속한 경제발전 과정에서 미처 청산하지 못한 적폐와 부정부패는 국민의 소중한 생명을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라고 언급한다.
이어서 김무성 대표는 “안전은 근본적으로 비용이 들고 불편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원칙을 도외시한 우리 사회의 폐습은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게 했다. 국민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책임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국민을 실망시켰다”라며 자성한다. 좋다. 대통령 연설문 전문을 먼저 읽고 여당 대표의 연설문 전문을 접한다면 초반부터 감동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무성 대표가 말하는 ‘정치’는 딱 거기까지. 이어서 김 대표는 곧바로 다음과 같이 치고 나간다. 김 대표는 “세월호 참사 이후 정치권이 보여준 행보는 더욱 부끄러웠다. 우리 국회는 지난 5월 이후 5개월 동안 단 한건의 법안도 처리하지 못하는 식물국회로 일관했다”라고 비판한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국회를 바라보는 시선, ‘비효율의 집단’이란 반정치적 인식을 그대로 대변한다.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3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마친 뒤 의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균형을 잡는 부분도 있었다. 김무성 대표는 “정치는 진영논리에 빠져 갈등을 해소하기보다는 갈등을 더 부추기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라면서,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 기본인데, 세월호 참사라는 국민적 슬픔 앞에서도 우리 정치는 자기 주장만을 관철시키려는 극한 대립의 모습만 연출했다”라고 비판했다. 이는 해석에 따라선 야당 뿐 아니라 청와대와 여당까지 비판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김무성 대표의 연설문 초반에는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한국 사회의 문제는 지적하려고 하는 ‘교묘함’이 가득하다.
이후 김무성 대표는 미래권력이 되기 위한 자신의 비전을 말한다. 김 대표는 “유럽 각국은 1960년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시절 ‘유러피안 드림’으로 불리는 복지체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과도한 복지는 ‘복지병’을 유발해서 근로의욕을 떨어뜨렸고, 국민들을 나태하게 만들었고, 그 나태는 필연적으로 부패를 불러왔다. 그 결과 ‘저성장-고실업’ ‘사회갈등과 분열’이라는 고질병에 시달리게 됐다“라고 말한다.
이이서 김무성 대표는 네덜란드의 1982년 노사정이 참여하는 바세나르 협약을, 독일의 슈뢰더 총리의 ‘아젠다 2010’을 예로 들면서 복지를 줄이는 결단을 내린 유럽 국가들이 승승장구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북서유럽과 달리 남유럽은 “경제가 나빠지는 데도 높은 연금과 실업수당, 무상의료와 대학원까지의 무상교육 체계를 유지했다”면서, “그 결과 막대한 재정보전으로 국가 부채가 급증해 경제는 파탄으로 치달았고, 그 후유증은 대량실업이었다. 기성세대가 빚으로 흥청망청한 결과, 미래세대인 청년층은 지금 일자리를 찾지 못해 길거리를 헤매며 좌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일말의 긍정성도 없다고는 볼 수 없다. 과거 유럽의 복지국가가 고도성장과 인구 증가를 전제로 설계된 시스템이란 건 옳은 말이다. 따라서 한국의 진보진영의 생각과 달리 우리가 본받아야 할 복지국가는 ‘과거 유럽’이 아니라 ‘현재 유럽’의 변형된 모델일 수 있다.
▲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 3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 설명에는 ‘북유럽’이란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다.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모델은 남유럽 모델보다 더 복지에 재정을 쏟아붓는 구조임에도 모범적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이들 역시 과거에 비해선 복지의 양을 줄였지만 말이다.
남유럽과 북유럽을 비교하면 문제는 복지의 양이 아니라 복지를 하는 방식일 수 있다. 많은 복지제도 전문가들 역시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북유럽’을 생략하고 ‘북서유럽’과 ‘남유럽’만을 비교하니 마치 복지를 줄인 나라는 흥했고 복지를 유지한 나라는 망했다는 식의 호도가 된다. 한국 사회는 복지를 늘려야 하는 입장인데도 말이다. 이처럼 김 대표의 연설은 대통령의 것보단 아름답지만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세계경제의 모습을 왜곡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묘’하다.
문희상 위원장 연설, 새정치 이만큼만 해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연설에 이어진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장의 연설문 전문을 읽으면서 감탄했다. ‘친노’에 속하지만 온건파이며 친화력이 있는 문희상 위원장의 ‘능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문희상 위원장은 연설 서두에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의 저력은 세계인을 세 번이나 깜짝 놀라게 했다.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산업화를 이뤄냈다.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민주화를 이뤄냈다.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정보화도 이뤄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조 받는 나라에서 원조 주는 나라로 우뚝 섰다. 대단한 국민이다. 하면 된다는 국민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함께 했을 때 가능했던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의 역사인식을 포괄하는, 중도파를 최대한 배려하는 서술이었다.
이어서 문희상 위원장은 “그러나 요즈음 국민의 삶은 날이 갈수록 점점 팍팍해지고 있다. 민주주의가 점점 후퇴한다는 말이 파다하다. 우리 모두 꿈과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절망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문희상 위원장은 그 책임을 박 대통령과 현 정부에게 돌렸다. 문 위원장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지난 대통령 선거 때만 해도 우리에게는 아직 꿈과 희망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면서, “그때 여야 대선후보들은 서로 경제민주화, 복지, 한반도 평화를 앞 다투어 국민 여러분께 약속하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했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대위원장이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마치고 나서 동료 의원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문희상 위원장은 “이러한 국민적 합의, 여야를 초월한 합의는 현대 정치사상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시대정신은 바로 경제민주화, 복지 그리고 한반도 평화인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국민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을 박근혜 대선 후보가 더 잘 현실화시킬 수 있다고 신뢰를 보냈고 대통령으로 선택했던 거다. 그러나 지금 2년차에 접어든 박근혜정권의 현 주소는 어떤가? 이 모든 약속들은 허언이 됐고, 국민은 꿈과 희망을 잃고 좌절하고 있음을 저는 가슴을 치는 심정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정면으로 현 정부를 비판했다.
문희상 위원장은 ‘초이노믹스’도 정면 비판했다. 문 위원장은 “지금 세계는 ‘부채 축소, 소득주도 성장’에 나서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심지어 ‘부자들의 모임’이라고 불리는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도 ‘소득주도 성장’ 정책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라면서, “도대체 대한민국만 '나홀로 부채 확장, 부채주도 성장'을 외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최경환 경제팀에 국민들이 기대했던 것은 출범 초기 ‘소득 주도 성장’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말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렸다. 대신 투자활성화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라고 비판했다.
또 문희상 위원장은 복지재원 문제를 논의할 ‘국민대타협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문 위원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약속한 ‘증세 없는 복지’는 지금 ‘복지 없는 증세’로 바뀌었다. 그것도 담뱃세, 자동차세 등 온통 서민증세 뿐”이라고 현 세태를 비판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과정에서 조세문제 논의를 위한 사회적 논의기구를 약속한 바 있다. 이에 국회 차원의 지속가능한 복지재원 논의를 위한 ‘국민대타협위원회 구성’을 제안한다”라고 대통령의 공약을 이용한 역공에 나섰다.
문희상 위원장은 이하 공무원연금개혁, 공교육 문제, 주거 문제, 노인 문제, 일자리 문제, 노동 문제, 농민 문제, 외교·안보·통일 문제, 민주주의와 개헌 문제, 마지막으로 안전 문제를 언급했다. 흔히 시민들이 새정치민주연합이 많이 내세운다고 보는 가치에 입각한 주장은 뒤에 배치하고 민생문제들을 앞에 배치했다. 세월호 참사 역시 언급은 하되 맨 뒤로 보냈다.
▲ 정홍원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들이 3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희상 비대위원장 연설문의 압권은 <논어>의 공자님 말씀인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우면 된다는 것을 인용하며 “청청여여야야언언(靑靑與與野野言言)". 청와대는 청와대다워야 하고, 여당은 여당다워야 하고, 야당은 야당다워야 하고 언론은 언론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내세운 것이다. 문 위원장의 발언은 민주주의 원칙에서도 나무랄데가 없을뿐더러, 그 내용을 동양 고전을 통해 드러내면서 노년층 유권자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시도가 좋다고 해서 반드시 호응이 따라온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전히 한국 사회는 보수정권이 지배하고 있고 그들의 의도대로 사회는 굴러간다. 하지만 문희상 위원장의 연설은 새정치민주연합이 정권을 되찾기 위해 염두에 둬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지점이 있다고 하겠다. 야권의 다른 정치인들이 여기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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