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검찰이 세월호 선장에게 사형, 1등항해사에게 무기징역을 각각 구형했다. 법으로 물을 수 있는 가장 강도 높은 처벌을 법원에 요구한 것이다. 실종자 가족들은 이런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 의지를 믿고 수색 지속 결정을 재고해주길 바란다”

28일 <중앙일보> 사설 <세월호 가족 "수중수색 지속" 결정 재고하기를…>의 한 구절이다. 검찰이 세월호 선원들에게 중형을 구형한 27일 실종자 가족들은 수중 수색 중단 여부에 대한 논의를 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9가족 중 5가족이 수색 지속을 희망해 범정부사고대책본부에 다음달 수색계획 수립을 요청했다.
세 개 신문의 사설이 그러한 결정을 비판했다. 28일 <동아일보> 사설은 <세월호 인양 여부를 실종자 아홉 가족에게만 맡길 건가>란 제목을 달았다. 제목만 보면 수중수색 중단과 세월호 인양 여부를 실종자 가족의 판단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매우 ‘무례’한 사설로 짐작된다. 내용은 그 정도는 아니다. 세월호 인양에도 비용이 많이 드니 다른 판단 주체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사설은 이렇게 말한다.
▲ 28일자 동아일보 12면 기사
“세월호를 인양하려면 최대 1조 원의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실종자 아홉 가족의 결정에만 맡겨두기에는 너무 막대한 비용이다. 게다가 선체를 인양한다고 해도 남은 실종자 10명 중 몇 명을 더 찾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비용과 효과를 따져보면 인양하지 않고 해상 추모공원으로 만드는 등의 다른 방안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최종적으로는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정부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가장 온건한 사설은 <한국일보> 사설 <세월호 인양, 정부가 책임 있는 대책 제시해야>였다. <한국일보> 사설은 “어이없게 잃은 피붙이의 주검이라도 온전히 품에 안기 위해 200일 가까이 한뎃잠을 자며 버텨 온 가족들로서는 ‘수색 중단’과 ‘선체 인양’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가족들의 이번 결정을 무모하고 이기적이라고 몰아 붙이는 일각의 비난도 온당치 못하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수중 수색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임은 분명해 보인다”라며 가족들의 처지를 배려하면서도 수중 수색이 지속되기는 어렵다는 점을 밝혔다.
<한국일보> 사설은 “그 동안 세월호 유족과 실종자 가족들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 탓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정당한 요구를 하면서도 불온세력으로 매도 당하기도 했다. 더 이상 가족들에게 책임을 떠넘길 것이 아니라 정부가 나서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 28일자 조선일보 12면 기사
정리하자면, 수색은 한계에 도달한 상황일 수 있다. 우리는 인양을 수색에 반대되는 개념을 생각했지만, 수색과 상관없이 인양도 선택일 수 있다. ‘비용’을 걱정하는 <동아일보>의 태도는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해상추모공원이란 제안도 검토해볼만하다.
그러나 선원에게 중형을 구형한 검찰의 모습을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 의지”라 표현한 <중앙일보>의 태도는 한국 사회가 세월호 참사라는 기억을 떨쳐내는 방식을 보여준다. 물론 선원들의 잘못은 분명히 있지만 검찰 수사는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면서 빠져나오려는 한국 보수세력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세월호 특별법에 있어 그토록 유족들의 태도를 비판했던 보수언론이 검찰 수사를 근거로 한국 사회가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적절한 것인가.
돌이켜보면, 이와 같은 대처 역시 대통령과 청와대의 기획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참사 이후 한달이 지난 5월 19일 담화문을 발표하며 “이번 참사에서 수백 명을 버리고 도망친 선장과 승무원의 무책임한 행동은 사실상 살인행위”라며 “앞으로 심각한 인명피해 사고를 야기한 사람들에게는 엄중한 형벌이 부과될 수 있도록 형법 개정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검찰은 굳이 형법을 개정하지 않아도 엄중한 형벌을 부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 28일자 한겨레 4면 기사
이준석 선장은 최후 변론에서 “죽을 죄를 졌지만 살인의 고의는 전혀 없었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 말은 아마도 옳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결부되어 있고 밝혀내고 시정해야 할 구조의 문제가 존재한다. 이 문제를 잘 정리한 것으로 한신대 사회학과 김종엽 교수가 5월 14일 <허핑턴포스트>에 게재한 <세월호가 드러낸 배반의 연쇄>란 글이 있다. 일부 인용해 보자면 이렇다.
(...) 내 보기에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보다 태도와 거동에 주목해야 한다. 태도나 거동은 꾸미기 어렵고, 그만큼 행위자의 내면적 동기나 상황 파악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경우 주목할 점은 해경이 구출할 때 이들이 보인 태연함이다. 팬티 차림 선장을 염두에 두면 태연하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보기에 선원들의 동작 전반은 침착하며, 사태가 예측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였다. 이들이 진도 VTS와의 교신에서 거듭 해경이 왔는가를 묻는 모습, 구출 직전 전화기를 다시 찾으러 간 1등 항해사의 모습은 이런 추정을 강화한다. 이 태연함을 자비의 원칙에 입각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들이 "해경이 도착했으니 그들이 승객들을 잘 구하겠지"하고 믿었다고 보는 것이다. 선원들은, 해경은 '자신들과 달리' 선의를 가지고 직무에 충실할 것이라 믿고 구조의 바통을 맘 편하게 해경에게 넘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만일 승객 수백 명이 죽게 될 것을 예상했다면, 혹은 사건 직후 대통령이 나서서 "살인과도 같은" 행동이라 묘사할 것을 예상했다면, 그들은 결코 태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원들이 생각했듯이 해경은 자신들과 달랐을까? 현장에 처음 도착한 123정 함장은 인터뷰에서 세월호 가까이 배를 대면 함께 침몰할 것을 우려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안전이 우선이었고, 그 점에서 선원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이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해상 구조업무를 위한 해경의 훈련 및 장비 구입 예산은 형편없이 적었지만, 골프장을 짓는 데는 140억 정도의 예산을 썼다고 한다. 이런 보도는 해경이 누릴 수 있는 것에는 집착하지만 직무에 대한 충직성은 없었음을 말해준다. 더불어 왜 그들이 선원은 구해도 배 안의 승객은 구조하지 않았는지 짐작게 해준다. 그들은 연락이 되는 집단에 대해 할 줄 아는 일만 한 것이다.
▲ 28일자 조선일보 12면 기사

변변한 잠수체계를 갖추지 못한 해경은 자신들에게 닥친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해경은 자신과 가까운 언딘마린인더스트리에게 문제 해결의 바통을 넘겼다. 언딘은 '자신들과 달리' 구조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은 것이며, 덤으로 자신들의 잘못도 잘 덮어 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만일 언딘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해경이 해군 UDT와 SSU를 가로막고 자원봉사 하러 온 민간 잠수사를 밀쳐낼 만큼 '대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딘은 독점적 사업권에서 얻을 이익에는 관심이 있었겠지만, 제대로 된 구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런 연쇄는 세월호 침몰 이후뿐 아니라 이전으로도 거슬러 올라간다. 청해진 해운은 불법 개조, 과적, 고박 미비, 평형수 덜 채우기 등으로 사고위험을 잔뜩 높였지만, '자신들과 달리' 선원들은 비상사태를 잘 처리할 것이며, 구조는 해경이 잘 해줄 것이고, 손실은 보험회사가 메꿔 주리라 믿은 것 같다. 어제 뉴스에 의하면 세월호 구명벌 검사를 소홀히 한 혐의로 한국해양안전설비 대표 등이 구속됐다. 그들은 아마 자신은 검사를 대충해도 선사와 선원들이 구명벌 쓸 일을 만들지는 않으리라 믿은 것 같다. 마찬가지로 한국선급, 해운조합, 해수부는 업무는 태만하게 처리하고 이권을 누리는 데 더 신경을 썼지만, 선사는 '자신들과 달리'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도 배를 침몰시킬 수준의 어리석음을 저지르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생각의 출발점은 선원들과 해경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를 이해해보려는 것이었지만, 그런 시도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것은 어떤 기묘한 믿음의 연쇄이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 뒤에는 "나는 무능하고 태만하며 직무는 제쳐놓고 특권을 탐닉하며 종종 부패하기까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달리 직무에 충직하며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의 연쇄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사회가 부여한 신뢰를 배반하지만 그 배반 때문에 팽개쳐진 과제를 누군가는 처리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 이런 추론이 맞는다면, 세월호 참사는 그것을 둘러싼 행위자들이 살아가는 세계 그리고 그 배경을 이루는 우리 사회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신뢰를 배반하고 선의를 약탈하는 일이 계속된 결과 그런 배반을 통해 이익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타자의 선의와 유대감이 심하게 고갈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이 저지른 신뢰의 약탈이 야기한 위험을 방어하고 파괴를 치유할 타자가 저기 어딘가에 남아있다는 믿음을 배반자들 스스로 거두어 들여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뢰와 희망의 자원이 우리 사회에서 아예 증발돼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약탈자가 많은 사회에서도 그들에게 약탈될지언정 신뢰를 생성하는 이들이 어디엔가 있다. 아니 우리 사회에는 그런 이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 그렇지만 세월호 참사는 적어도 어디까지 신뢰의 약탈이 진행됐는지 증언한다. 우리는 해수부-해운조합/한국선급-청해진 해운-선장과 선원-해경-언딘의 연결 고리에서 타자에 대한 신뢰라는 바통을 이어받을 집단이 없었음을 목도했으며, 참사를 처리하는 국면에서 국가 관료들 그리고 국가 관료와 기업이 얽힌 지점에서 배반과 '먹튀'가 편만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뢰 약탈자들 속에서도 그들과 달리 공익적 가치를 지킬 '순수 기업인' '순수 관료' '순수 대변인' '순수 대통령'이 없는 것이다. (...)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 ‘배반의 연쇄’의 문제를 성찰하지 않고 연쇄고리의 일부만을 훑었을 뿐이다. 몇몇 사람을 특출나게 부도덕하고 악덕한 사람으로 만들어 사태를 덮으려 한다.
▲ 28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
하지만 그것만으로 가능할까? <시사in> 369호에 실린 정신분석가 이승욱의 말을 들어보자.
(...) 세월호 참사 이후 고향 친구들과 모임을 갖는데, “우리가 공범이다”라는 얘기들을 해서 놀란 일이 있다. 대구에 사는 평범한 50대 가장들이었는데, “우리라고 선장이랑 달랐겠냐” “우리라고 배에 과적하는 것 막고 불법 증축하는 걸 막을 수 있었겠냐”라고 너나없이 한탄하는 거다. 이걸 보면서 세월호가 엄마들한테는 ‘굉장한 슬픔’으로 다가왔지만 아빠들한테는 ‘굉장한 죄책감’으로 다가왔구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부정과 비리에 눈감은 게 자기 한 몸 때문이었나? 아니다. 다 자식들을 위해 참은 거라 생각하며 살았을 텐데 그 자식이 죽어버렸으니, 가장 핵심적인 알리바이가 처참하게 사라져버렸으니…. (...)
<시사in>369호, <바로 그 '남들처럼'이 문제라니까> 중에서
우리는 그 ‘죄책감’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했고 필사적으로 억압했다. 하지만 이렇게 억압된 것은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